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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다시 ‘민중’인가-신자유주의와 진보세력의 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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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석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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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외교연구센터 / 시민사회와 사회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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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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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보고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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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사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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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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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위기를 맞고 있는 진보 정치세력이 가야할 길을 <민중에서 시민으로> 제시하는 담론이 퍼져가고 있다. 가령 한국에서 민주주의와 진보를 접목시켜온 대표적 정치학자인 최장집 교수는 민중에서 시민으로의 주체 전환을 강조했다. 최 교수의 의도는 경제적 민주주의와 사회적 시민권을 한국 사회에 책임 있게 구현해 가자는 데 있다. 하지만 바로 같은 이유에서라도 2008년 3월 지금 이 순간에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민중에서 시민으로>가 아니다. <시민에서 민중으로>다.
2.
한국 민중운동은 동학혁명부터 줄기차게 새로운 사회를 이루려는 창조적 투쟁을 벌여왔다. 민중이란 말이 처음 문헌에 등장하는 시점도 갑오농민전쟁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조선이 식민지로 전락한 뒤, 특히 1919년 3.1봉기 뒤부터 민중은 일제 강점기 내내 혁명의 주체로 거론되었다. 가장 대표적 보기가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이다. 단재는 조선혁명을 민중적 경제, 민중적 사회, 민중적 문화, 민중적 조선으로 제안했다.
하지만 민중운동은 분단체제가 뿌리 내리면서 단절되었다. 지하로 흐를 수밖에 없었던 민중운동은 4월 혁명을 거쳐 군부독재정권이 경제성장을 주도하던 1970년대에 다시 표면으로 나타났다. 민중 담론이 다시 시작된 것도 이 시기다. 한국 민중운동은 부마항쟁과 오월항쟁을 거치면서 급속도로 성장했다. 1980년대 내내 민중 담론은 시대정신이었다. 그 일차적 열매가 1987년 6월대항쟁이다. 민중과 민중운동이란 말에는 한국 사회에서 역사적 새 지평을 연 풍부한 경험이 녹아들어 있다.
3.
6월대항쟁은 군부독재와 맞서 싸운 민중운동의 역사적 기념비다. 하지만 대통령 직선제 개헌에 너무 매몰되어 그것이 받아들여지면서 급속도로 퇴조를 맞았다. 그 결과다. 군부독재가 물러나면서 빈 공간에 자리 잡은 것은 민중운동의 주체도, 보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민주인사들도 아니었다. 군부의 빈 공간에 터 잡은 것은 자본과 언론의 동맹이다. 그 동맹은 표면적으로 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으로 바뀐 정치 현상 깊숙한 곳에서 집요하게 신자유주의 논리를 관철시켜갔다. 한국 정치를 바라보는 국민적 눈높이가 달라야 할 이유다.
4.
1980년대에 주도적 흐름이던 민중 담론은 1980년대 후반부터 점점 빠른 속도로 사라져갔다.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내적 요인이 가장 중요하다. 민주화운동을 주도한 세력 스스로 민중 담론을 가볍게 여겼기 때문이다. 특히 핵심 세력일수록 그랬다. 민중 담론은 모호하고 낭만적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래서 나타난 게 한쪽에선 마르크스-레닌주의였고, 또 한쪽에선 주체사상이었다. 이른바 PD와 NL의 등장이다. 두 운동세력은 갈수록 교조적이고 선언적 논리로 현실을 재단해갔다. 가령 ‘민중’이란 말을 ‘노동자’로 대체해야 한다면서, 아직도 ‘민중’을 들먹이는 사람은 공부를 덜했거나 치열하지 못한 사람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바로 그런 무모함 때문에 1989년부터 실존 사회주의국가들이 무너지면서 민중운동은 치명상을 입었다.
5.
민중 담론이 사라진 데는 당연히 상대방인 외적 요인도 크다. 1980년대 민중운동의 괄목할 성장에 위기의식을 느낀 지배세력이 ‘민중’이란 말을 희화화하거나 금기시했기 때문이다. 희화화와 금기시는 얼핏 보면 정반대 같지만 동전의 양면이다. 민중이란 말을 운동권이라는 ‘시사용어’와 더불어 아주 낡은 개념처럼 희화화하는 한편, 민중이란 말은 좌파적 용어라는 논리로 아예 통용을 가로막기도 했다. 왜 자본이 민중이란 말을 희화화하고 금기시했는지, 민중 담론이 사라진 오늘, 깊이 성찰할 필요가 있다.
6.
민중 담론은 수구적 보수와 관념적 진보 양 쪽으로부터 모두 비난받아 급속도로 사라졌다. 비단 담론의 차원만이 아니다. 담론의 차원에서 민중이란 말의 죽음은 곧장 민중의 죽음으로 이어졌다. 그것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1987년 6월대항쟁의 한 복판에서 고 문익환 목사는 민주화운동에 목숨 바친 열사들의 이름을 호명하며 통곡했다. 모두 흐느꼈다. 그러나 그 통곡 뒤 20여 년 동안 더 많은 사람들이 노동현장, 농촌현장, 거리에서 목숨을 바쳤다. 하지만 아무도 그 이름을 호명하며 흐느끼지 않는다. 우리 사회가 이미 민주화했다는 착각에 더해 ‘집단 이기주의’라는 이데올로기 공세가 사회구성원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그래서다. 통곡으로 호명하며 <왜 다시 민중인가>를 쓴다.
7.
1997년 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 사태는 미국이 냉전에서 이긴 뒤 한국경제를 더는 ‘자본주의의 전시장’으로 만들어 놓을 이유가 없어진 데서 기인한다. 김영삼 정권 말기에 시작된 한국 경제의 미국 경제 편입은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거쳐 이명박 정권에 들어서서 완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바로 그것이 IMF에서 한미FTA에 이르는 과정이다. 그것은 경제적 민주주의나 사회적 시민권에 무지했고 의지도 없었던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무능이 극명하게 드러난 과정이기도 했다.
8.
자본과 언론의 집요한 공격으로 민중운동은 큰 손상을 입었다. 더 큰 문제는 자본과 언론 동맹의 부당한 공격으로 진보세력이 자신의 정당성을 성찰할 기회를 놓친 데 있다. 여전히 자급자족 경제체제를 고집하거나 이미 실패로 끝난 국가사회주의 실험에 연연하는 진보세력에게 민중은 자신의 하나뿐인 인생을 맡기기 꺼려했다. 그 민중의 선택 앞에 과연 돌을 던질 수 있는 자 누구인가. 만일 2007년 대선에서 민주노동당 후보가 누구였든 당선되었다고 가정했을 때, 과연 집권 뒤 한국 경제를 관리하며 4800만 명을 먹여 살릴 능력이 있었을까에 대해, 이제 우리는 정직하게 답해야 한다. 선뜻 “그렇다”라고 확신할 수 없다면, 지금 우리가 할 일은 분명하다. 실현가능한 대안과 정책을 마련하는 데 힘을 모아야 옳다.
9.
우리가 살고 있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현실을 냉철하게 직시하는 데서 진보정치는 출발해야 옳다. 우리는 지금 비정규직 노동자와 도시빈민, 청년실업자가 급증하고 중산층마저 붕괴되고 중소상공인들이 경영 위기에 몰리는 사회에 살고 있다. OECD국가 가운데 자살률이 가장 높다. 다른 나라와 달리, 대다수가 생계형 자살이다.
묻고 싶다. 신자유주의로 무장 고통 받고 있는 국민 대다수, 곧 노동자-농민-영세자영업인-중소상공인-청년학생-지식인을 ‘민중’이 아닌 그 어떤 이름으로 호명할 수 있는가. 반면에 이명박 정권은 대통령부터 청와대 수석, 장관에 이르기까지 철두철미한 부자정권이다. 부도덕한 정권을 부자언론이 뒷받침하고 있다.
그래서다. 신자유주의를 넘어선 사회, 새로운 사회가 한국의 진보세력이 가야 할 길이다. 그 방향은 곧 경제 민주화의 길이자 경제 자주화의 길이고, 통일민족경제의 구현으로 이어진다. 문제의 핵심은 신자유주의를 넘어서고 6․15공동선언을 실천해가는 최소강령 수준 이상의 최대강령을 주장하는 게 실제로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는 데도, 분단체제를 넘어서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없는 데 있다. 하물며 진보정당의 분열은 해악이다. 신자유주의와 분단체제는 이 땅에서 서로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깊숙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10.
새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길에서 국민적 동의와 참여는 단순히 바람직 한 게 아니다. 필요충분조건이다. 국민적 동의와 참여 없는 변혁에 미래가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20세기를 통해 뼈저리게 학습했다. 따라서 지금 진보정치세력이 걸어갈 방향은 분명하다. 실현가능한 새로운 사회의 비전과 정책으로 민중과 하나가 되는 데 있다. 그 지난한 과정 없이 진보정치의 미래는 어둡다. 우리가 다시 민중을 호명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물론, 2008년 오늘의 ‘민중’ 호명은 1980년대처럼 현실과 괴리된 지식인이 ‘대중’을 대상화해 부르는 호명이 아니다. 생활인들 스스로 바로 우리가 민중이라는 겸손한 성찰과 자각에서 출발해야 옳다. 진보정치세력이 민중과 하나로 거듭나는 과정을 거칠 때, 비로소 분열을 벗어나 더 강력하고 더 큰 정당으로 단결할 수 있다. 고통 받고 있는 민중에게 깨끗한 희망일 수 있다.
11.
한국 민중운동은 군부독재와 맞서 민주주의를 일궈왔다. 하지만 6월대항쟁 뒤 20년이 지난 오늘, 국민 대다수는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 고통 받고 있다. 그렇다. 우리의 힘으로 군부독재를 물리쳤지만, 그 자리에 들어선 것은 군부독재보다 더 세련된 자본독재다. 세련된 독재 때문에 민중은 군부독재 시기보다 쉽게 포섭 당하지만, 신자유주의의 야만적 본질을 인식할 때는 모순을 자각하는 속도가 더 빠를 수 있다. 모든 가치의 기준이 이윤인 자본독재에 맞서, 국가 구성원 개개인이 참다운 주권자로 살아가는 주권운동을 힘 있게 벌여나갈 때다. 다채롭게 전개되고 있는 모든 부문운동이 독자성을 지니면서도 공통된 밑절미가 될 수 있는 주권운동은 그 자체가 정치운동인 동시에 범국민적 학습과정이어야 옳다.
12.
주권운동은 국민 대다수인 민중이 주체가 되어 새로운 경제, 새로운 사회를 열어가는 새로운 정치과정이다. 사회경제적 민주화는 단순히 노동3권이나 최저생계비와 같은 기본권 보장이나 재벌 부패를 견제하는 차원에 그칠 수 없다. 나라 안팎의 투기자본과 주주의 무제한적 권리를 제한하고, 기업 활동에 노동자 참여를 제도화함으로써 노동의 창조성을 경제발전의 새로운 동력으로 삼아야 옳다. 민중이 경제활동에서 실질적 주권을 확립하는 길은 곧장 새로운 정치, 새로운 사회로 이어진다. 그 과정에서 민중 또한 거듭날 수밖에 없다. 새로운 사회의 조건은 새로운 사람이고, 새로운 사람의 조건은 새로운 사회다.
손석춘 gil201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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