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평화를 이야기하면 북한, 핵무기, 군사적 긴장, 남북 관계, 통일과 평화 체제 같은 단어들이 떠오른다. 학문 영역에서도 평화 연구는 오랫동안 분단 문제와 상당 부분 겹쳐 있었다. 정전 상태와 남북한의 군사적 대치, 북한의 핵과 미사일 문제가 지속되어 왔다는 점에서 이는 자연스러운 결과이기도 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하나의 역설이 있다. 분단이 평화를 연구하게 만든 가장 강력한 현실이었다면, 동시에 무엇을 평화의 문제로 볼 것인가를 규정하는 힘으로도 작용했다. 북한과 핵, 통일과 안보, 남북 관계와 평화 체제라는 절박한 의제가 연구와 정책의 관심을 그 주변으로 끌어당겼다. 누군가 다른 평화의 문제를 의도적으로 배제했다기보다 분단이라는 현실이 평화를 바라보는 시선을 지속해서 끌어당긴 결과에 가깝다.
이를 이 글에서는 ‘분단의 중력’이라고 표현한다. 이 글의 관심은 그 중력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평화의 문제로 보았고, 평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어떻게 상상해 왔는가에 있다.
평화를 바라보는 시선은 어떻게 달라졌는가?
평화를 전쟁의 반대말로만 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평화학에서 오래된 질문이다. Johan Galtung은 폭력을 직접적인 물리적 폭력에 한정하지 않고, 사회구조에 의해 인간의 잠재적 삶과 실제 삶 사이에 피할 수 있는 격차가 발생하는 경우까지 폭력의 문제로 보았다.1)
이러한 접근은 전쟁이나 직접적 폭력의 부재를 넘어 사회구조와 사람들의 삶까지 평화의 문제로 바라보는 계기를 제공했다. 국가 간 관계가 안정되면 사람들의 삶도 평화로운가? 2000년대 이후 평화구축 연구에서는 여기에 또 다른 질문이 더해졌다. 누가 평화를 정의하고, 누가 평화구축의 주체가 되는가라는 질문이다.
그 흐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논의가 Local Turn이다. Mac Ginty와 Richmond는 국제기구와 외부 전문가들이 설계한 평화구축 과정에서 지역 행위자의 지식과 경험, 주체성이 어떤 위치에 놓이는지를 질문했다. Local Turn은 단순히 지역주민의 목소리를 더 듣자는 것을 넘어, 누가 평화를 정의할 권한을 가지며 어떤 지식과 경험이 평화에 관한 지식으로 인정되는가라는 인식론적 문제를 제기했다.2)
비슷한 시기에 전개된 hybrid peace에 관한 논의는 평화가 형성되는 과정에 주목했다. 평화는 국제적·국가적 제도와 지역의 규범 및 실천 가운데 어느 한쪽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서로 수용하고 저항하며 변형되는 과정에서 혼합적으로 형성된다는 것이다.3) Everyday peace는 다시 평범한 사람들의 행위에 주목한다. Mac Ginty는 분열된 사회에서 사람들이 상대 집단을 피하고, 관계를 조정하고, 필요할 때 협력하면서 폭력적 충돌을 피해 가는 일상적 실천 역시 평화가 형성되는 중요한 과정으로 보았다.4)
Local Turn, hybrid peace, everyday peace가 하나의 선형적인 이론적 발전 과정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들 논의는 평화를 국가나 제도가 완성해 사회에 전달하는 결과물보다 다양한 행위자와 제도, 관계와 실천이 교차하며 형성되는 과정으로 본다는 점에서 만난다.
분단은 ‘평화의 문법’도 만들었는가?
분단은 한국 평화연구의 대상뿐 아니라 평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상상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분단의 중력이 무엇을 평화의 문제로 볼 것인지를 규정했다면, 여기서 형성된 ‘평화의 문법’은 평화가 어떤 주체와 경로를 통해 만들어진다고 상상하는지를 의미한다. 국내에서도 everyday peace를 한반도에 적용하여 거시적 평화·통일 담론을 미시적이고 일상적인 평화의 관점에서 재검토하려는 노력이 있었다.5) 이 글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한국의 평화 담론이 왜 특정한 방식으로 평화를 상상하게 되었는지를 분단이라는 조건에서 묻는다.
한반도 평화에는 익숙한 경로가 있다. 핵과 군사적 위협을 줄이고, 남북 관계를 개선하고, 교류와 협력을 확대하며, 궁극적으로 안정적인 평화 체제를 구축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과정이 ‘안보 위협의 완화-관계 개선-제도적 평화 체제-평화’라는 하나의 선형적 경로로 굳어질 때다. 평화는 국가가 만들어 사회로 전달하는 결과물처럼 이해되기 쉽다.
Local Turn을 비롯한 비판적 평화구축 논의는 바로 이 선형성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국가가 만드는 제도적 평화와 지역의 질서, 시민사회의 활동과 개인의 실천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고 충돌하고 협상하며 서로를 변형시킨다. 따라서 국가 간 관계가 개선되었다고 같은 수준의 평화가 사회 전체에 곧바로 전달된다고 가정하기 어렵다. 비핵화 이후에 평화가 오는지를 묻는 데서 나아가, 비핵화와 관계 개선이라는 제도적 변화가 사회의 다른 층위와 어떻게 연결되며 어떤 평화를 만들어내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국가의 시각에서 평화는 군사적 안정과 제도적 관계의 회복일 수 있다. 접경지역 주민이나 이산가족, 남북 교류에 참여해 온 사람들에게 같은 변화는 서로 다른 의미로 경험될 수 있다. 따라서 ‘한반도 평화’라는 하나의 표현 안에도 서로 다른 평화의 경험이 존재할 수 있다. Mac Ginty의 Everyday Peace Indicators에 관한 논의가 의미를 갖는 것도 이 지점이다.6) 그의 관심은 표준화된 지표와 주민의 판단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정확한지를 가리는 데 있지 않았다. 어떤 지표를 선택하는 순간 이미 무엇을 평화로 볼 것인지에 관한 판단이 개입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한반도의 평화를 정상회담, 군사적 충돌의 감소, 교류 협력의 규모로 읽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을 본다면 무엇이 보이지 않게 되는가. 그렇다고 직장의 갈등, 세대 갈등, 기후와 주거의 문제를 모두 평화로 포괄한다면 개념의 설명력은 오히려 약해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평화의 영역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만들어 내는 관계를 더 정확하게 보는 것이다.
‘분단의 중력’ 안에서 시선을 옮기기
한국 평화연구에서 오히려 경계할 것은 ‘분단의 중력’이 평화를 바라보는 유일한 위치가 되는 경우다. 한반도에 평화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와 함께, 그 과정에서 어떤 평화가 만들어지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국가가 만드는 평화가 사회의 다른 층위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변형되는지, 반대로 시민과 지역의 관계와 실천이 제도적 평화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거시적 평화와 일상적 평화는 서로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제도적 변화와 삶의 경험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보여주는 분석의 층위다. 필요한 것은 분단의 중력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중력 안에서 평화를 바라보는 위치를 조금 옮겨보는 것이다.7) 그런 의미에서 한국 평화연구에는 평화의 목표와 실제로 만들어지는 변화를 지속해서 대조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비핵화와 남북관계 개선, 평화체제가 사회의 여러 층위에서 어떤 변화를 만들어내는지를 함께 살펴보자는 것이다. 분단이 한국의 평화연구를 만들었다면, 이제는 분단이 만들어온 ‘평화의 문법’까지 다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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