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명사적 단층선과 기정학(技政學:Tech-politics)의 대두
 
  영토의 경계를 다투던 지정학(Geopolitics), 자본과 자원의 흐름을 통제하던 지경학(Geo-economics) 위에 이제 새로운 층위가 얹히고 있다. 첨단 기술의 주권이 국가의 안보와 번영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기정학(技政學, Tech-politics)의 시대다.
 
  18세기 증기기관이 산업혁명을 촉발하고 20세기 말 인터넷이 정보혁명을 열었듯, 인공지능과 에너지가 이끄는 오늘의 변화는 산업의 변동을 넘어 문명의 운영 방식 자체를 바꾸고 있다.
 
  안보의 개념도 군사력에 머물지 않는다. 기후위기 극복 능력과 기술 경쟁력이 하나로 얽힌 복합안보의 시대다. 이상기후는 이미 식량과 에너지를 위협하며, 재해재난과 보건위기를 초래하고 있다. 여기에 막대한 전력을 소비하는 인공지능이 결합하면서, 기술은 환경에 부담을 지우는 동시에 기후 문제를 푸는 가장 강력한 도구라는 두 얼굴을 갖게 되었다.
 
  한중 관계도 역시 이 대전환의 한가운데 서 있다. 202511월 시진핑 국가주석의 방한과 20261월 이재명 대통령의 국빈 방중을 통해 양국 관계의 전면 복원이 확인되었다. 지난 8월 왕이 외교부장의 서울 방문에서는 외교안보 당국 간 대화 채널을 정례적으로 운영하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오는 11, 중국 선전에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열린다. 지난 30여 년을 지탱해 온 양국 경제협력관계는 기후와 기술의 세계 규칙을 함께 만들어 가는 질적 전환의 시험대에 올라 있다.
 
2. 2026년 여름의 두 신호: 상하이와 샌프란시스코
 
  지난 7, 인공지능의 미래를 두고 두 개의 신호가 나타났다. 716일 상하이에서 세계인공지능협력기구(WAICO) 설립 협정 서명식이 열렸다. 러시아·카자흐스탄·인도네시아·파키스탄 등 29개국이 서명했고, 유엔 헌장의 목적을 따르는 정부 간 국제기구로서 본부를 상하이에 두기로 했다. 이튿날 개막한 제9회 세계인공지능대회(WAIC)에는 시진핑 주석이 2018년 대회 창설 이래 처음으로 직접 참석했다. 시 주석은 인공지능의 발전이 한 나라의 독주가 아니라 국제 협력의 교향곡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며, 개방과 호혜, 위험에 대한 인식, 상호 학습, 단결과 협력의 네 가지 방향을 제시했다. 향후 5년간 개발도상국에 5,000명 규모의 인공지능 연수 기회를 제공하고, 기상 조기경보 인공지능 '마쭈(妈祖)'30개국에서 실제 활용하도록 추진하겠다는 실행 계획이 함께 나왔다. 아세안·아랍연맹·아프리카연합·브릭스 등을 대상으로 한 국제 인공지능 응용협력센터 구상도 제시되었다.
 
  일주일 뒤인 724, 한국 정부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샌프란시스코 AI 서밋을 열고 샌프란시스코 AI 선언을 발표했다. 세계 최고 수준의 메모리 반도체 역량을 바탕으로 글로벌 AI 공급망의 핵심 국가이자 생산 기지로 도약하겠다는 구상이다. 이 자리에서는 반도체 공급과 데이터센터 구축을 아우르는 대규모 협력이 함께 발표되었다. 한국 정부는 여기서 두 가지를 함께 밝혔다. 하나는 다양한 지역의 국가들과 수평적 협력 네트워크를 구축해 더 많은 나라와 시민이 인공지능 생태계에 참여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기술이 만든 성장의 과실이 교육과 의료 같은 보편적 권리로 돌아가게 하는 'AI 기본사회'.
 
  두 도시에서 구사한 언어는 달랐다. 중국은 다자 기구와 규범의 틀을 세워 글로벌 사우스를 포함한 보편적 참여의 길을 열고자 했다. 한국은 물리적 공급 역량을 축으로 삼아서 수평적 협력의 그물망을 넓히려 했다.
 
  그러나 두 언어가 겹치는 지점이 분명히 있다. 기술의 혜택이 특정 진영이나 소수에게 갇혀서는 안 된다는 점이 공통의 인식이었다. 그리고 인공지능을 공공재의 영역으로 끌어내려야 한다는 문제의식도 닮았다. 오늘의 논의는 바로 이 겹치는 자리에서 출발한다.
 
3. 화이부동(和而不同): 린치핀과 플랫폼의 상보성
 
  『논어는 군자가 화()하되 동()하지 않는다고 했다. 서로 같아지지 않으면서도 어울린다는 뜻이다. 이 오랜 지혜는 오늘의 한중 관계를 설명하는 가장 정확한 언어다. 두 나라는 같은 자리에 서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함께 설 수 있다.
 
  한국의 자리는 세계 공급망의 핵심 핀, 기정학적 린치핀(Linchpin)이다. 오늘날 인공지능의 발전을 물리적으로 제약하는 가장 큰 요인은 연산 장치의 속도가 아니라 데이터를 실어 나르는 통로의 폭이다. 계산 능력은 비약적으로 빨라졌으나 데이터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병목을 만든다. 이 병목을 여는 핵심 부품이 초고속 메모리 반도체(HBM)이며, 한국은 이 분야에서 세계 시장의 대부분을 공급하고 있다. 대규모 연산 인프라는 이 부품의 안정적 공급 없이는 확장되기 어렵다. 한국의 위치는 여기서 나온다.
 
  중국의 자리는 규모와 연대가 만드는 플랫폼(Platform)이다. 세계 최대의 내수 시장과 재생에너지가 만들어낸 저렴한 전력을 바탕으로, 중국은 누구나 가져다 쓸 수 있는 개방형 모델을 대규모로 공급하고 다자 협력의 마당을 열었다. 기술의 블록화에 반대하고 개방과 포용을 앞세운다는 것이 중국이 밝혀온 입장이다. 인공지능에 접근할 길이 없던 많은 나라에게 이는 실질적인 기회로 받아들여졌다.
 
  오늘날 다양한 영역에서 인공지능의 규범을 만들고 있다. 유엔과 경제협력개발기구, 주요국 협의체, 지역 기구가 각기 다른 층위에서 규칙을 쌓아 올리고 있다. 한국 역시 2024년 서울에서 인공지능 정상회의를 공동 주최했고, 지난해 경주 APEC의 의장국으로서 'APEC AI 이니셔티브'를 정상선언의 부속서로 담아냈다. 규범 형성은 하나의 좌석이 아니라 여러 겹의 과정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 논의할 물음은 서로 다른 자리에서 만들어지는 규칙들이 어떻게 서로를 읽을 수 있게 할 것인가다. 이 물음 앞에서 린치핀과 플랫폼은 경쟁 관계가 아니다. 하나는 물리적 층위에 있고 다른 하나는 제도적 층위에 있다. 층위가 다르면 다투는 것이 아니라 맞물린다.
 
  두 나라가 향하는 곳도 다르지 않다. 소외된 지역을 돕고 기술을 공공재로 쓰겠다는 뜻은 같다. 다만 중국이 국제 연대의 틀을 짜는 기구 중심의 접근을 택했다면, 한국은 제조 역량과 포용적 사회 모델, 그리고 신흥국에 친근한 문화적 자산을 바탕으로 의료와 교육의 현장 문제를 푸는 방식에 강점이 있다. 린치핀과 플랫폼 사이에 우열은 없다. 서로의 자리를 인정하고 맞물려 돌아갈 때, 두 나라는 각자의 자리에서 더 안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
 
4. AI for Green, Green for AI
 
  AI와 생태 문명의 결합은 개별 사업에 앞서 두 개의 축으로 정립되어야 한다. 하나는 기후 거버넌스를 위한 AI(AI for Green). 인공지능을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도구로 만들어서 예측력과 복원력을 끌어올려야 한다. 대기질 분석, 해양 생태계 보전, 기후 리스크 조기경보 등 AI를 기후위기에 적용하는 방법은 제한이 없다. 다른 하나는 지속 가능한 AI인프라(Green for AI). AI 운영과정에서 발생하는 탄소 발자국과 전력 소모를 최소화하는 것을 설계해야 한다.
  전자는 인공지능으로 기후를 다스리는 일이고, 후자는 기후의 관점에서 인공지능을 다스리는 일이다. 두 축은 방향이 반대이지만 하나의 순환을 이룬다. 이 순환이 성립할 때 비로소 기술이 환경을 해치며 발전한다는 모순에서 벗어날 수 있다.
 
  기상과 생태는 변수가 지나치게 많아 전통적 계산으로는 예측의 한계가 뚜렷한 영역이다. 인공지능은 바로 이 지점에서 돌파구가 된다. 양국이 각자 축적한 관측 데이터를 공동의 분석 기반으로 연결하면, 태풍의 경로와 가뭄의 위험, 오염물질의 이동을 훨씬 정밀하게 예측할 수 있다. 재생에너지의 간헐성 문제 역시 수요와 공급을 미리 계산해 조율하는 지능형 전력 운영으로 완화할 수 있다. 이 분야는 정치적 민감성이 낮고 성과가 눈에 보인다. 협력의 출발점으로 적합하다. 이것이 AI for Green의 실천이다.
 
  대규모 AI인프라는 발전소 규모의 전력을 소비하고 막대한 냉각수를 필요로 한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환경이 훼손되는 모순을 방치할 수 없다. 저전력 반도체 설계, 손실을 줄이는 전력 인프라, 데이터센터의 에너지 효율 기준. 이 세 영역에서 양국은 각자 강점을 갖고 있으며, 그것을 합칠 때 아시아가 제시할 수 있는 '그린 AI'의 기준이 만들어진다. 이것이 Green for AI의 실천이다.
 
5.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세가지 층위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연대와 협력은 통상 정부와 기업, 민간이라는 세 층위에서 맞물려 돌아가야 한다. 정부 층위에서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중국이 넓은 지역을 아우르는 면()의 전략을 편다면, 한국은 전략적 거점 국가에서 확실한 성공 사례를 만드는 점()의 전략이 어울린다. 두 접근은 배타적이지 않다. 양국이 개발협력 사업을 공동으로 설계해 시범 국가를 정하고, 보건과 재난 대응 인프라를 함께 구축하는 모델을 만들 수 있다.
기업 층위에서는 문제 해결형 모델이 필요하다. 신흥국이 겪는 물 부족과 기후재난, 감염병 문제를 양국 기업의 기술과 제조 역량으로 함께 푸는 장기적 공급이 그것이다.
  민간 층위에서는 지역 주민이 주체가 되는 데이터 안전망을 세워야 한다. 재난과 감염병에서 가장 먼저 피해를 입는 것은 현장의 사람들이다. 지역 공동체가 스스로 보건과 위험 정보를 모으고 이를 분석해 취약계층을 돌보는 방식은, 두 나라가 각자 추구하는 기술 포용의 철학을 현장에서 구현하는 길이자 이웃 국가로 확산 가능한 모델이다.
 
  AI 활용과 기후위기 극복을 위한 아시아 국가들의 연대와 협력이 위 세가지 층위에서 이뤄지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이런 이상적인 방향을 추구해 나가기 위해서 한중 두나라 석학들의 지혜와 전략이 필요한 것이다.
 
6. 결론: '아시아 AI 기후포럼'의 공동 발기
 
  중국에는 실 한 올로는 선을 이룰 수 없고 나무 한 그루로는 숲을 이룰 수 없다(單絲不成線, 獨木不成林)는 오랜 말이 있다. 한국이 축적한 제조 역량과 포용적 사회 모델, 중국이 열어놓은 시장과 다자 협력의 마당은 서로를 배제하지 않는다. 두 나라가 함께 만들 수 있는 것은 새로운 진영이 아니라 공공재다. 기후 예측의 정확도, 재난 경보가 도달하는 속도, 데이터센터가 쓰는 전력의 효율. 누가 만들었는지보다 누가 쓸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한 재화들이다. 아시아가 여기서 기여할 몫은 아직 충분히 채워지지 않았다.
 
  인공지능으로 기후를 지키고, 기후의 눈으로 인공지능을 다스리는 일. 이 두 방향의 순환을 아시아가 먼저 보여줄 수 있다면, 그것이 이 지역이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가장 실질적인 기여가 될 것이다.
 
  『사기(史記)에는 밝은 이는 싹트기 전에 멀리 내다보고 지혜로운 이는 형체가 드러나기 전에 위험을 피한다(明者遠見於未萌 智者避危於無形)는 구절이 있다. 올해 11월 안탈리아와 선전의 두 무대를 향해, 아시아의 녹색 기술 비전을 함께 준비할 '아시아 AI 기후포럼'의 공동 발기를 제안한다. 한중 양국의 민간이 함께 여는 자리이되, 아세안과 그 밖의 아시아 국가들, 그리고 이 의제에 뜻을 같이하는 어느 나라의 참여에도 열려 있는 개방형 플랫폼이어야 한다. 이념과 국경을 넘어, 기술과 생태의 이름으로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 이 글은 2026년 9월 16일 중국 베이징에서 개최된 "한중미래협력포럼"에서 세션2, '글로벌 협력: 기후 거버넌스와 인공지능 시대 한중협력의 새로운 지평'에서 발제한 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