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알렉산더의 칼’을 꺼내 들었다. 40일이면 끝날 줄 알았던 이란 전쟁은 6개월째 계속되고 있는데, 출구 찾기는 쉽지 않다. 미중 전략 경쟁은 치열해졌고, 미국 중간선거는 코앞으로 다가왔다. 이란 전쟁의 여파로 물가는 오르고 트럼프의 지지율은 계속 떨어지는 추세다. 그의 앞길은 ‘고르디우스의 매듭’처럼 복잡하게 꼬여 있다.
파격적인 한미군사연습 대폭 축소
2026년 8월 16일. 트럼프 대통령은 소셜미디어 '트루스 소셜'에 중대한 발표를 했다.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에게 한미 연합군사연습의 대폭 축소를 지시한 것이다. 하반기 한미 연합 정례 훈련인 '을지 자유의 방패(UFS)' 개시를 불과 몇 시간 앞둔 시점이었다. 전격적이다. 한미 동맹 73년 역사에서 전례를 찾기 힘든 일방적 조치다. 명분은 세 가지였다. 훈련에 소요되는 막대한 비용. 훈련이 북한에 주는 '적대적이고 부적절한 신호'. 그리고 이란 전쟁과 관련된 한국 정부의 군사적 비협조다.
그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매우 좋은 관계"라는 점을 과시했다. 자신이 대통령으로 있는 한 북한은 위협적이지 않다는 개인적 신뢰를 정책 결정의 주요 근거로 삼았다. 이에 따라 한미 군 당국은 당초 8월 27일까지 11일간 예정되었던 UFS 훈련 기간을 단축했다. 반격 작전을 상정한 2부 야외 기동훈련(FTX)은 전면 취소되었다.
이는 단순한 군사적 결정이 아니고, 또 예산 절감 차원도 아니다.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장기간 교착 상태에 빠진 북미 관계를 바꿔보려는 트럼프의 계산이 깔려 있다. 하노이 회담 결렬은 트럼프에게 미련을 남겼다면, 김정은 위원장에게는 ‘절치부심’을 심어주었다.
하노이 결렬 이후에도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과의 '개인적 친분'을 지속적으로 과시했다. 북한이 단거리 탄도미사일 도발 등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김정은 위원장과 관계가 "매우 훌륭하다"고 빈번히 언급했다. 상호 간의 친서 교환 사실도 알렸다. 이는 북미 정상회담의 상징성과 가치를 인정한다는 뜻이다. 동시에 해결하기 곤란한 북핵 문제를 자신이 안정적으로 통제하고 있다는 국내 정치용 서사이기도 했다. 미국 정부는 "완전한 비핵화 없이는 제재 해제도 없다"는 원칙을 유지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언제든 정상 간 결단으로 판을 바꿀 가능성을 열어두었던 것이다.
하노이와 경주
트럼프 대통령의 이러한 인식은 2025년 10월 한계에 직면했다. 경주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계기였다. 재집권에 성공한 트럼프는 다자 외교 무대인 경주 APEC을 기점으로 극적인 이벤트를 희망했다. 김정은 위원장과의 만남이었다. 글로벌 위기가 산적한 가운데, 극적인 평화 이벤트를 통해 외교적 입지를 다지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북한은 트럼프의 거듭된 구애를 철저한 침묵과 무시로 일관했다.
하노이에서 뼈아픈 실패를 경험한 김정은 위원장이었다. 실질적인 제재 완화나 안보 보장 조치가 필요했다. '사진 촬영용 만남'에 더 이상 소모되지 않겠다는 원칙은 확고했다. 하노이 결렬 이후 북한 매체들은 ‘웅대한 작전’을 보도했다. 한마디로 트럼프를 상대하기 위해 힘을 기르겠다는 구상이다. 이 과정에서 남한 배제가 필요했다. 대미 협상을 장기적으로 대비하기 위한 '자력갱생'과 '정면돌파'의 원칙이다. 남한의 존재는 오히려 대미 협상력을 약화시킨다고 보았다.
그러던 와중 윤석열 정권이 대북 긴장조성 정책을 취한 것이 북한에 명분을 제공했다. 북한은 남북관계를 ‘교전 중인 두 개의 적대국가’로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북한은 북미 관계가 근본적으로 변화하기 전까지 이 구상을 계속 유지할 것이다.
북한이 하노이의 좌절을 교훈 삼아 마련한 협상력 강화의 핵심은 군사력과 경제력이다. 그 목표점은 2026년 예정된 노동당 제9차 대회였다. 9차 당대회 이전에 트럼프와 만나는 것은 협상력을 키우기도 전에 미리 김을 빼는 일이다. 실제로 북한은 9차 당대회에서 군사력의 발전을 대내외에 과시했다. 그 과녁은 명백히 북미 정상회담이다. 김정은이 9차 당대회 이전인 2025년 10월 경주에서 트럼프의 구애에 응하기는 어려웠던 배경이다. 트럼프의 일방적인 '거래의 기술'이 더 이상 김정은에게 통용되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덩치가 커진 북한
9차 당대회를 마친 2026년은 상황이 다르다. 북한은 2019년 하노이 회담 당시와는 다르게 덩치를 키웠다. 여기서 트럼프의 발언은 주목을 끈다. 그는 지난 8월 19일 “57개의 매우 강력한 핵무기를 가진 김정은과 아주 잘 지내고 있다”고 말했다. 나아가 “올해 안에 그와 만날 것”이라고 공언했다.
2025년의 만남을 거부한 북한은 2026년 2월 9차 당대회 이후 대미 협상의 문턱을 한층 높이 끌어올렸다. 비핵화를 전제로 한 '보상 교환 모델'은 북한 내부에서 완전히 폐기되었다. 9차 당대회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북한의 핵보유국 지위를 대내외에 선포했다. 헌법에 명시된 '영구적'이며 '불가역적'인 권리임을 거듭 강조했다. 북한은 이미 2022년 '핵무력 정책법'과 2023년 헌법 명시를 통해 핵 선제 사용의 법적 기반을 마련한 바 있다.
나아가 핵 통제 체계를 개편했다. 김 위원장 1인에게 집중된 핵무기 통제 및 사용 권한을 국가 핵무력 사령부 등 하부 핵심 조직에 위임할 수 있도록 했다. 이른바 '데드 핸드(Dead Hand)' 체계의 구축이다. 외부의 타격으로 지휘부가 마비되더라도 핵 보복 시스템이 자동 가동된다. 억제력의 신뢰성을 과시하려는 조치다. 아울러 해군력 강화를 위한 '해상 및 수중 전력의 핵무장화'를 핵심 과제로 채택했다. 수개월 뒤 김정은은 신형 '최현급' 구축함 진수식에 참석했다. 극초음속 전략 순항미사일과 전술 탄도미사일 탑재가 가능한 함정이다. 해상 핵 타격 능력을 노골적으로 과시한 것이다.
일련의 조치는 명확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북한의 핵무기는 더 이상 경제적 제재 완화와 맞바꿀 '협상용 카드'가 아니다는 것이다. '비핵화'라는 의제 자체를 협상 테이블에서 원천 배제하라는 요구이다. 핵보유국 지위를 상호 인정하고, 그 전제하에 새로운 협상 규칙을 만들자는 압박이다.
핵무력의 제도적 완성이 전부가 아니다. 9차 당대회는 대남전략을 근본적으로 전환한 것을 거듭 확인하고 고도화했다. 북한은 대한민국을 '동족'이나 '평화 통일의 대상'에서 완전히 삭제했다. 대신 '제1의 적대국'이자 '교전 중인 두 국가' 관계로 재정의했다. 남북 간 대화와 교류를 위한 기존 합의와 기구는 전면 폐기되었다. 이러한 대남 배제 전략은 오직 미국과의 협상에만 집중하겠다는 선포다.
트럼프는 한미 군사연습 축소의 결정적 사유를 명시적으로 밝혔다. 이재명 한국 대통령이 이란의 비핵화를 위한 미국의 군사 캠페인 동참 요청을 거절했다는 점이다. 트럼프는 이를 "아니오, 사양합니다(No thanks!)"라는 표현으로 짚었다. 이란 전쟁과 한반도 방위는 지리적, 전략적으로 철저히 무관한 사안이다. 한국의 입장에선 당연한 거절이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셈법은 다르다. 동맹국이 미국의 글로벌 지정학적 이해관계(중동 파병 등)에 자원을 제공하지 않으면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 역시 동맹국의 핵심 안보 이익인 연합 방위태세를 언제든 축소하거나 철회할 수 있다. 징벌적 비용을 청구할 수 있다는 선례를 남긴 것이다. 이는 김정은의 대남 배제 전략과 완벽히 맞물린다. 향후 한국에 닥쳐올 거대한 파도를 예고하는 기상예보와 같다.
국제 정세 역시 북한의 대미 협상력을 키워주고 있다. 북한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파병한 유일한 국가다. 북·러 관계는 군사동맹 수준으로 강화되었다. 미·중 대결 구도 속에서 중국 역시 북한의 든든한 뒷배가 되었다. UN 대북제재는 더 이상 작동하기 어렵다. 이렇게 몸집을 키운북한은 이란 공격에 대해서도 트럼프를 직접 비난하지 않았다. 이란 전쟁의 장기화로 난처해진 트럼프를 지켜보며 느긋하게 대미협상 전략을 가다듬고 있을 것이다.
트럼프 앞에 놓인 ‘고르디우스의 매듭’
반면 트럼프 대통령이 직면한 대내외 상황은 ‘고르디우스의 매듭’처럼 꼬여 있다. 2026년 2월 말, 미국은 이란을 공격해 지도부를 제거했다. 당초 트럼프 행정부는 이란의 핵심 군사 시설과 핵 인프라를 정밀 타격해 전쟁을 단기에 끝내겠다고 장담했다. 그러나 전쟁은 6개월째 지루한 소강상태와 국지적 격화를 반복 중이다. 장기화라는 수렁에 빠져들고 있는 조짐이다. 길어지는 이란 전쟁은 미국의 외교·군사 역량을 심각하게 갉아먹었다. 전쟁은 이미 거대한 블랙홀이 되었고 미국의 글로벌 안보 자산에 심각한 경고등이 켜졌다.
중동 전역의 방공망을 유지하느라 패트리엇 요격 미사일 등 정밀 탄약 재고가 바닥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이란의 비대칭 작전에 대응하다 미군의 첨단 무인기(드론) 전력도 상당수 소모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이란 전쟁 때문에 인도-태평양 및 한반도 지역의 군사적 긴장 억제력마저 분산되고 있다.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 전술과 보복 공격은 글로벌 에너지 공급망을 직접 타격했다. 국제 유가는 폭등했고, 간신히 안정세를 찾던 미국 내 인플레이션은 다시 가파르게 치솟았다. 유권자의 80% 이상이 해외 군사 개입의 장기화를 우려하고, 트럼프 정부의 경제 정책에 대한 신뢰도는 곤두박질쳤다.
국내 정치 지형은 트럼프의 입지를 계속 위협한다. 인플레이션 재발과 전쟁 피로감은 2026년 11월 3일 예정된 미국 양원 중간선거를 앞두고 악재가 될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은 30%대 초반까지 추락했다. 하원 다수당 지위마저 야당인 민주당에 내어줄 수 있다는 전망이 나도는 상황이다. 트럼프에게는 국면을 단번에 전환할 돌파구가 절실해졌다.
트럼프는 북미 정상회담을 원한다. 그 분위기를 지렛대 삼아 이란 전쟁이나 가자 전쟁의 비판 여론을 잠재우려 할 것이다. 자신이 사실은 ‘평화의 수호자’였다고 목소리를 높일 수도 있다. 김정은과의 만남은 트럼프 자신이 '글로벌 피스메이커(Global Peacemaker)'라는 정치적 서사를 구축할 가장 매력적인 소재다. 8월 UFS 연합훈련을 사전 협의 없이 전격 축소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과거의 실패를 딛고 김정은을 다시 테이블로 끌어내기 위한 일종의 ‘선불’이다.
군사적 압박의 핵심인 연합훈련을 선제적으로 축소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최근 카네기 국제평화재단 등 미국의 주류 싱크탱크와 전문가 그룹의 기류도 변했다. 북한의 핵무장을 통제 불가능한 '기정사실'로 수용하는 분위기다. 불가능한 비핵화 요구 대신 무력 충돌 방지와 군비 통제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주장이 거세다. 이른바 '안정적 공존(Stable coexistence)' 노선으로 대북 정책을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트럼프 대통령도 북한을 ‘일종의 핵보유국(sort of nuclear power)’으로 지칭해 왔다. 그의 발언은 미국 내 정책 패러다임 전환과 유사한 맥락이다.
9월 미중 정상회담을 지켜볼 김정은의 시선
트럼프 대통령이 던진 훈련 축소라는 승부수는 독자적 행위가 아니다. 2026년 9월부터 11월로 긴박하게 이어지는 굵직한 외교 일정과 정교하게 맞물려 작동하는 고도의 지정학적 게임이다. 다가오는 9월, 시진핑 주석이 워싱턴을 방문한다. 북한 문제는 글로벌 공급망 문제와 더불어 양국 정상회담의 핵심 의제로 테이블에 오를 것이다.
백악관이 이란 전쟁이라는 교착 상태를 타개해야 하고 북한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베이징의 외교적 레버리지가 필요하다. 중국은 오래전부터 북한 핵·미사일 도발 중단과 한미 훈련 중단이라는 '쌍중단'을 주장해 왔다. 자국의 코앞인 한반도에서 미국이 군사훈련을 축소하는 것을 중국은 내심 환영할 수밖에 없다. 미국은 1월 베네수엘라 마두로 납치에 이어 멕시코, 쿠바, 파나마, 그린란드 등 서반구 지역에서 중국의 손발을 옥죄었다. 2월 말 이란 공격이 계획대로 조기에 마무리되었다면 이 역시 중국을 압박하는 효과를 거뒀을 것이다. 하지만 이란 전쟁의 장기화는 미국의 구상에 차질을 가져왔다.
이런 상황에서 샅바싸움을 하던 트럼프와 시진핑이 9월 워싱턴에서 만난다. 그리고 11월 중국의 기술 허브인 선전(Shenzhen)에서 열리는 APEC 정상회의로 이어진다. 미국 언론은 트럼프와 김정은이 APEC 무대에서 다시 손을 맞잡을 것이라 보도했다. 이는 트럼프의 머릿속에도 자리 잡은 유력한 시나리오일 수도 있다. 김정은 위원장에게도 선전 APEC은 기회다. 핵보유국 통치자로서 당당히 국제무대에 복귀하는 화려한 데뷔 무대가 될 수 있다.
하지만 희망은 전략이 아니다. 덩치를 키운 김정은 위원장은 하노이의 수모를 잊지 않았다. 몸값을 비싸게 부를 것이다. 하노이에서 요구했던 수준을 훌쩍 뛰어넘을 것은 자명하다. '핵보유국 지위에 대한 법적 인정', '대북 제재망의 전면 해체', '전략자산 한반도 전개의 항구적 금지' 등은 에피타이저에 불과하다. 식탁에는 북한 경제발전을 위한 대규모 투자사업이 오를 수 있다. 김정은은 트럼프가 시진핑과 협상해 준비한 메뉴판을 본 이후에야 움직일 것이다.
9차 당대회를 거치며 김정은은 계산을 마쳤다. 남은 2년 반의 트럼프 임기를 버틸 덩치를 키웠다는 자신감이다. 그러나 몸집만 키웠을 뿐, 2년을 넘기기는 힘든 기초 체력은 약점이다. 지금은 경주 APEC 당시 트럼프의 구애를 무시했던 때와는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앞으로 2년 동안 트럼프와 김정은의 치열한 밀당은 계속될 것이다. 결과는 2년 안에 드러난다. 이런 상황에서 ‘코리아 패싱’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그러나 명심해야 한다. 현재 경기장에 오른 선수는 오직 북한과 미국뿐이다.
기원전 333년, 알렉산더 대왕은 단칼에 매듭을 베어 아시아의 주인이 되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꺼낸 칼이 진정한 의미의 ‘알렉산더의 칼’이 될지는 아직은 알 수가 없다. 알렉산더의 칼이 매듭을 자른다면, 아마도 북한은 그 길을 걸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관중석에서 타국의 선의에 의존해 발만 구를 여유가 없다. 하지만 ‘페이스메이커’에서 ‘피스메이커’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한 것 또한 현실이다. 우리가 처한 딜레마이다. 지난 시절 남과 북이 마주 앉아 평화를 노래하던 낭만적인 경기장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만은 직시해야 한다. 경기장이 달라진다면 경기 규칙도 달라지는 것이다. 달라진 규칙을 익히고 연습하고 시연해볼 무대를 만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