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1월 21일부터 24일까지 코리아연구원에서는 제1차 글로벌 평화순례를 실시하였다. 순례를 통해 평화순례 참여자들은 원자폭탄 투하 지역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기념관과 평화공원, 추모비를 보고 희생자들을 위해 추모하였다. 여기에 나가사키 기행문을 적고자 한다.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 하늘 위로 미군 폭격기 폭탄창이 열리자 커다란 폭탄이 떨어졌다. 팻맨(Fat Man)이었다. 팻맨은 플로토늄 원자폭탄으로 충격을 가하면 폭발할 위험이 있었기에, 폭격기 출격 직전 미군 항공기지 현지에서 조립되었다. 플로토늄 코어 위를 노란색 외피가 감싸고, 이음새 부분을 접합하기 위한 검은 밀봉제가 도포되었다. 노란색 위 검은 줄무늬, 알록달록하게 생긴 이 기괴한 폭탄은 미국 폭격기에 실려 나가사키로 향하게 되었다.
나가사키 원폭자료관 전시관에는 팻맨의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팻맨의 모형을 지나면, 폭발 이후 나가사키의 참상을 보게 된다. 첫 번째 원자폭탄 투하가 있던 8월 6일 이후 사흘 만에 두 번째 버섯구름이 일본 위로 피어났다. 팻맨이 폭발하자 빛이 도시를 덮쳤다. 폭발에 가까이 있던 이들은 건물 벽 위에 그림자로만 남게 되었다. 히로시마에서처럼, 많은 사람이 원폭에 피폭되어 고통을 겪어야 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두 곳의 평화 순례를 다녀오면서, 나는 나가사키가 원폭 투하를 추모하고 평화를 기념하는 방식에 있어 히로시마와는 달랐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앞서 다녀온 1955년 원폭 투하로부터 10년 뒤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에 조성된 평화기념관은 건축가 단게 겐조(丹下健三)가 설계한 콘크리트 건물로 크고 장엄한 건축물이다. 관람객은 어두운 전시실로 들어서서 히로시마의 끔찍한 참상을 목격하게 된다. 반면 나가사키 원폭자료관은 히로시마 평화기념관과 같이 1955년 개관하였지만, 작은 전시관이었다. 1996년 다시 지어진 전시관은 땅 아래에 묻혀 유리 돔만이 땅 밖으로 나와있었다. 다양한 나라에서 온 관람객들로 붐볐던 히로시마 평화기념관과 달리 나가사키 원폭자료관 입구는 한산했고, 종이학만이 평화순례를 온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그리고 나가사키 원폭자료관은 원폭의 참상을 알리는 데 있어 히로시마와 달랐다. 전시관에 입장하자마자 어둠이 내려앉았던 히로시마 전시관과 달리, 나가사키 원폭자료관 전시관에 들어서면 관람객들은 유리 천장 아래로 빛이 내려앉은 나선형 길을 따라 내려가게 된다. 2025년 오늘날에서 아래로, 과거로, 벽면에 붙여진 희망의 새하얀 종이학을 따라가다 보면 나선형 길 마지막에는 1945년 8월 9일이 벽에 새겨져 있다. 그리고 전시관 입구에는 멈춰진 나가사키의 벽시계가 걸려있다. 관람객들은 여기서부터 나가사키의 역사를 반추하게 된다. 항구 도시로서, 개항장으로서, 가톨릭교회의 성지로서, 그리고 일본 태평양전쟁 군항의 중심지로서 나가사키를. 그리고 원폭 투하 이후 있었던 참상을 당시 피해자들의 유품을 통해 목격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념관을 나오게 되면 다시 나가사키의 사람들이 접은 수많은 종이학이 우리를 반기게 된다.

나가사키 원폭자료관을 나와, 우리는 원폭자료관 그 아래에 있는 원자폭탄이 폭발한 지점과 한국인, 조선인 위령비를 찾아가게 되었다. 원자폭탄이 터진 곳 그 옆에는 우라카미 성당이 있었다. 성당 안에 있던 신부와 신자들은 폭발에 휘말려 죽게 되었다. 넓은 공간에 원폭이 터진 자리임을 알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었고, 그 옆에는 우라카미 성당의 옛 잔해가 자리해있었다. 원폭 폭발 지점과 원폭자료관 사이에는 한국인과 조선인 위령비가 자리하고 있었다. 히로시마에서처럼 작은 비석의 형태로. 평화순례를 온 우리는 위령비 앞에 서서 묵념하며 다시는 이런 참화가 일어나지 않기를 기도하였다.

나가사키는 히로시마와 같은 끔찍한 참상과, 피해자들의 유품, 그리고 그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하지만 나가사키는 히로시마와 달라보였다. 어째서였을까. 아마도 이는 일본을 잇는 중심지이자 군사 도시였던 지녔던 히로시마와 달리, 개항장이자 가톨릭 성지이며 군항 중심지였던 나가사키에 원폭 피해의 기억과 기념이 들어설 공간이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팻맨은 나가사키 시가지보다 조금 어긋난 북쪽 우라카미 지역에 투하되었고 산지가 많았던 나가사키 지형으로 인해 남쪽의 시가지는 비교적 온전할 수 있었다. 남쪽 시가지에는 가톨릭 성지 오우라 천주당과 개항장의 무대였던 데지마 섬, 그리고 일본 개항 근대유산이 원폭 투하로부터 살아남은 채 지금까지 남아있다. 팻맨이 떨어진 우라카미에만 원폭 투하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비록 나가사키 평화공원에도 웅대하고 장엄한 평화기념상이라는 기념물이 자리하고 있지만, 사람을 압도하게 만드는 히로시마의 평화기념공원과 기념관보다는 아니었다. 일본 근대 역사유적과 성당,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군항과 항구, 그리고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로 자그마한 여러 비석과 기념비들이 자리한 곳. 그곳이 나가사키였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우라카미 성당을 갔다. 우라카미 성당은 원폭 폭발 지점에서 조금 멀리 떨어져 있었다. 폐허가 되버린 성당을 허물고 새로이 세워진 우라카미 성당 안에는 원폭 폭발로부터 파괴되지 않고 남은 성모 조각상 얼굴이 벽면에 전시되어 있었다. 성당은 미사가 이뤄지지 않아 어두웠고, 스테인드글라스 사이로 빛이 쏟아져 성당을 다채롭게 비추고 있었다. 성당을 나서자 정오를 알리는 우라카미 성당의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평화가 이곳에 영원히 내려앉기를, 그리고 모두와 함께하기를 맘속으로 다시 기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