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를 통해 평화순례 참여자들은 원자폭탄 투하 지역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기념관과 평화공원, 추모비를 보고 희생자들을 위해 추모하였다. 나는 순례에서 히로시마·나가사키의 많은 기념물과 추모비를 보았다. 나에게 있어 가장 기억이 강렬했던 곳은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그리고 평화기념관의 전시물들이었다. 여기에 히로시마에 대한 기행문을 적고자 한다.

히로시마 기념관 안으로 들어서면 관람객들은 기념관의 한쪽 벽을 가득 메운, 땅 아래에서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버섯구름을 보게 된다.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이후 일본인 사진사가 버섯구름을 촬영한 사진. 1945년 8월 6일 8시 16분 거대한 빛이 히로시마를 감싸고, 화염과 폭풍이 도시를 덮친 뒤, 솟아오른 버섯구름을.
우리가 역사책에서 찾아볼 수 있는 원폭 투하 당시 버섯구름은 미군 폭격기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푸른 하늘을 떠돌던 구름 위로 솟아오른 거대한 버섯구름을 승무원이 촬영한 사진. 무미건조한 버섯구름은 역사책 속 제2차 세계대전 서술 마지막에 자리해, 우리에게 원폭 투하를 “역사적인 순간” 중 하나로만 여기게 만든다. 반면 땅에서 솟아오른 버섯구름은 평화기념관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기록이 역사책 속 “역사적인 순간”과 달리 히로시마에서 일어난 비극은 그렇지 않음을, 땅에 있던 이들에게 끔찍한 비극이었음을 알리고 있다. 기념관에 들어온 모든 이들은 원자폭탄 구름을 촬영한 사진에 압도당하고 말을 잃어버린 채 전시물을 보게 된다. 그리고 사람들은 곧이어 참상을, 불타는 전차와 건물들, 그리고 하늘에서 내리는 낙진이 섞인 검은 비를 마시는 사람들을 목격하게 된다.

어두운 검은색 벽 아래 자리한 전시물들. 떠난 이들의 흔적, 그리고 생존자들이 살아남고자 투쟁한 흔적의 행렬을 지나면, 관람객들은 히로시마에 있던 외국인들의 행적과 발언에 도달하게 된다. 우리(한국인)는 그 중 히로시마 원폭 투하에서 살아남은 생존자 “한국인” 곽귀훈 씨가 한 말 앞에서 걸음을 멈추게 된다.
“원자폭탄 생존자에게는 경계가 없다. (A-bomb survivors know no borders.)”
혹은 “피폭자는 어디에 있어도 피폭자이다. (被爆者はどこにいても被爆者.)”
원자폭탄 생존자에게는 경계가 없다. 원자폭탄이 터지고, 일본 제국의 병참기지이자 군사도시였던 히로시마는 더 이상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히로시마는 폐허가 되었다. 아침 출근길 히로시마에 있었던 사람들, 학교로 가던 아이들, 그리고 회의를 하던 군인들, 포로들, 한국인들 모두 불길에 휩싸이게 되었다. 히로시마에 있던 모든 이들은, 그날의 비극을 말해주고 있다. 생존자들이 남긴 물품과 증언은 오늘날 우리에게 원폭 투하의 비극을, 평화의 소중함을 알린다. 곽귀훈 씨가 말한 것처럼, 생존자에게는 국경이 없다. 그리고 평화에는 국경이 없다. 평화는 모든 이들이 공유해야 할 소중한 것이니. 원자폭탄의 비극이 일어난 지 10년이 지난 1955년, 히로시마 평화기념관을 세우면서 히로시마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로 원자폭탄 생존자에게는 경계가 없을까? 평화에는 경계가 없을까?
곽귀훈 씨의 발언은 의미심장하다. 처절한 흔적과 유품을 통해 찾아온 사람들에게 평화를 강조하는 히로시마 평화기념관이 잊고 있었던, 또 다른 피해자의 발언이기 때문이다. 히로시마 속 평화에는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 그어져 있고, 어떤 사람들은 그 경계선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히로시마의 평화도 누리지 못했다. 바로 곽귀훈 씨의 고향인, 한반도의 사람들이었다.

평화기념관을 나오면 뒤편에는 사사키 사다코를 기념하는 어린이 평화기념비가 있다. 양팔을 활짝 핀 채 희망의 종이학을 들고 있는 아이의 동상. 어린이 평화기념비 아래에는 종이 달려 있어 많은 관람객이 평화를 기원하며 종을 울린다.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기념비에서 벗어나, 공원 숲길 한쪽으로 들어서면, 종소리가 들리지 않는 한적한 곳에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가 있다.
원래 위령비는 히로시마 평화의 경계 밖에 놓여져 있었다. 1970년 민단의 주도로 위령비가 세워질 당시, 위령비는 평화공원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평화공원 바깥 아이오이 다리 근처에 세워졌다. 이후 한국 사람들의 요청으로 위령비는 1999년 7월 평화공원 안으로, 평화의 공간 안으로 간신히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고 그뿐이었다. 위령비는 종소리가 들리지 않는 평화공원 깊숙이 있다. 공원 한적한 곳에서 위령비는 희생자를 추모하는 물병이, 사람들이 접은 종이학과 꽃다발이, 그리고 태극기가 놓인 채로 우리를 기다린다.
위령비가 주목을 받은 것은 2023년 5월. 윤석열 당시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당시 일본 총리가 위령비를 찾았을 때였다. 사실 위령비 참배는 일제강점기 시기 한국 징용자에 대한 보상을 놓고 이뤄진 ‘해결책’ 중 하나였다. 재일 한인들이 평화를 염원하며 세운 위령비는 평화를 위한다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한일 양국 우호의 형식적 상징으로만 기능해버리고 만 것이다. 사실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는 다른 기념물에 비하면 나은 대접을 받고 있었다. 한반도 남쪽 사람들의 위령비는 공원 안에 있었지만, 또 다른 한반도의 사람들, “조선인”을 기리는 공간은 평화공원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한반도 북반부의 사람들이 세운 기념물은 평화공원 경계에서 간신히 찾을 수 있었다. 기념물, 그들이 세운 시계탑은 평화기념관 주차장 잔디 담 사이에 끼어있었다. 이마저도 위령 기념비의 형식은 아니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귀국 기념 히로시마현 재류 조선인 귀국자. 1959년 12월 14일.” 히로시마에서 북한으로 건너간 사람들이 북한과 일본의 우호 증표로서 히로시마에 기증한 것이라고 한다. 간신히 평화를 기념하는 공간에 끼어들어간 듯 서 있는 시계탑. 북한과 일본의 관계가 멈춰버린 것을 은유하는 듯, 시계는 멈춘 채 흘러가지 않고 있었다. 평화공원 속 모든 시계는 원폭 투하의 순간을 상기하는 듯 끊임없이 흘러가며 차임음을 울리는데 말이다. 기념관 안 원자폭탄이 떨어진 이후 히로시마의 비극과 재건과 평화를 알리는 시계들은 돌아가고 있었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시계는, 한반도 북반부 희생자들의 슬픔과 기억은 멈춰버린 채 다시 돌아가고 있지 않았다.

경계 안에서의 평화, 경계 안으로 간신히 들어온 평화,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경계에 간신히 걸터앉은 평화. 사실 평화는 모든 이가 마땅히 누려야 할 보편적인 개념일 것이다. 하지만 히로시마 평화공원의 평화는 그렇지 않아 보였다.
기념관을 나서면, 원폭 사망자 위령비가 놓여져 있다. 위령비가 바라보고 있는 곳은 원폭돔. 그리고 옆에는 일본의 국기가 펄럭이고 있다. 한국 위령비 위에 놓여 가벼운 바람에도 휘날리던 작은 태극기와 달리, 커다란 일장기는 높은 깃대에 걸려 어지간한 바람에도 휘날리지 않았다. 우리는 하나의 사실을 알 수 있다. 평화. 히로시마 원폭 투하 이후 세워진 평화와 기억은 ‘그들’의 것임을. 히로시마에 있던 또 다른 이들의 평화와 기억은 간신히 평화의 공간 안으로 들어왔거나, 멈추어버린 채 경계 사이에서 맴돌고 있음을.
그러한 사실은 2016년 5월 버락 오바마가 히로시마를 참배한 때에도 드러났다.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은 히로시마를 방문하여 위령비 앞에 참배했다. 당시 원폭을 미국의 정상이 와서 참배한다는 사실은 일본과 미국의 역사적 화해를 넘어서, 곧 히로시마의 평화와 기억을 원폭을 투하한 국가 또한 공유한다는 의미였다. 한국 정부는 오바마의 한국인 위령비 참배를 요청하였지만, 이뤄지지 않았다. 그때 오바마가 접었던 평화의 종이학은 평화기념관 마지막 전시물 중 하나로 기념관 밖을 나가는 관람객들의 시선을 받게 된다. 히로시마가 달성한 평화. 원폭 투하국이 인정한 평화. 하지만 누군가는 여전히 인정받지 못한 평화. 결국 보편적이고 모두가 누려야 할 히로시마의 평화는 ‘그들’에게 한정된 채 평화공원 밖으로 벗어나지 않았다.
기행문의 마지막은 서두에 이야기했던 곽귀훈 씨의 이야기로 되돌아가고자 한다. 곽귀훈 씨는 단순히 히로시마의 비극이 모든 이들에게 해당되는 참상임을 알리는 사람은 아니었다. 한반도에 있던 곽귀훈 씨는 1944년 히로시마 군부대로 징집된 이후 원자폭탄을 맞게 되었다. 원폭으로부터 살아남은 그는 이후 일본 정부를 상대로 피해 보상을 요구하였고, 마침내 일본의 한국인 피해자 보상을 이끌었다.
“원자폭탄 생존자에게는 경계가 없다.” 곽귀훈 씨의 말은 곧 원자폭탄 희생자에 대한 보상은 똑같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평화는 경계가 없이 모두에게 주어져야 한다는 말이기도 했다. 한국인 피해자 보상을 이끈 공적 때문일지는 몰라도 곽귀훈 씨는 히로시마 기념관 한편에 자리한 외국인들의 증언 중 하나로 자리하여, 히로시마의 슬픔을 전 인류적인 슬픔으로 이끌기 위한 헌신 중 하나로 변모하였다. “원자폭탄 생존자에게는 경계가 없다”는 증언으로써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히로시마 평화기념관이 주목하지 않으려 했던 사실에 다가가게 된다. 결국 평화에는 경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