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국제정세 변화와 북한의 동향
현재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는 미국·중국·러시아 강대국 간 경쟁이 격화되는 가운데, 각국이 자국의 이익을 지키려는 움직임이 근저에 깔려 있다. 이러한 양상은 섣불리 ‘신냉전’ 구도로 단정하기 어렵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3년째 이어지면서 미국과 유럽은 러시아에 대한 제재와 우크라이나 지원을 강화하고 있고, 중국은 러시아와 전략적 협력을 과시하며 미국 주도의 국제질서에 도전하고 있다.
2025년 출범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2기 행정부는 시작부터 중국 견제를 최우선 과제로 내세워 동맹국들에게 더욱 분명한 전략적 선택을 요구하고 있다. 실제로 2025년 5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아시아안보회의(샹그릴라 대화)에서 헤그세스 미 국방장관은 “중국 억제를 위해 동맹들의 국방비 지출을 획기적으로 늘릴 것”이라고 밝혀, 동맹들과 함께 대중 압박에 집중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이는 한국 등 동맹국들이 기존에 취해오던 입장에 변화를 요구하는 신호로 해석된다. 다시 말해, 트럼프 2기 행정부는 한국에 중국과의 경제 관계보다 한미동맹에 기반한 안보 협력을 확실히 우선시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달라진 국제 환경은 한반도 정세에도 직간접적인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북한과 러시아 간의 군사 협력도 이례적으로 강화되고 있다. 2023년 9월에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러시아 아무르주의 보스토치니 우주기지를 방문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우주 및 군사 분야 협력을 논의했는데, 이는 양국 협력 강화의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그 이후 북한은 러시아에 포탄과 방사포 탄약 등 재래식 무기를 제공하고, 러시아는 북한에 위성 기술과 첨단 무기 개발 정보를 지원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북한 정규군 일부가 러시아군과 함께 우크라이나 전장에 투입되어, 북한과 러시아는 이른바 ‘혈맹’ 관계를 과시하고 있다.
북한은 2025년 초 최신예 수상함인 5,000톤급 ‘최현’급 구축함을 진수하여 공개하면서 이 함정에 전술핵 미사일을 탑재할 계획이라고 공언했다. 이러한 현대식 구축함 건조에는 러시아의 기술 지원이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결국 북·러 간 군사적 밀착은 북한의 재래식 전력 현대화를 뒷받침하며 한반도 안보의 새로운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전통적인 ‘혈맹’ 관계인 북한과 중국 간 협력도 국제 제재 국면에서 더욱 공고해지고 있다. 2020~2021년 코로나19 사태로 일시 단절되었던 북·중 교역은 2023년 이후 급격히 회복되어 2025년에는 팬데믹 이전 수준에 근접했다. 특히 김정은 위원장은 2025년 9월 초 중국의 항일전쟁 승전 80주년 전승절 기념식에 맞춰 베이징을 전격 방문하여 시진핑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실제로 2025년 9월 4일 김정은과 시진핑은 베이징에서 만나 국제 및 지역 정세에 대해 전략적 협의를 했으며, 이 자리에서 시 주석은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강조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정은과 시진핑의 회동 직후인 9월 한 달간 북·중 교역액은 약 2억 7천만 달러로 2019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해 양국 경제 협력이 급속히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북한이 러시아뿐만 아니라 중국과도 보조를 맞춰 제재망을 우회하고 체제 생존과 경제 개발을 도모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나아가 중국은 러시아와 함께 유엔 안보리에서 추가 대북 제재 결의에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에 사실상 제동을 걸지 않고 있다. 북한 입장에서는 중국의 이러한 정치적 엄호와 경제적 지원 덕분에 미국의 제재 압박을 견디며 대미 협상에서 완강한 입장을 유지할 공간을 확보하게 된다. 김정은의 중국 전승절 80주년 행사 참석은 북·중 혈맹 관계를 과시함과 동시에 한반도 문제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한반도 정세는 미·중 대결 구도와 긴밀히 연계되어 움직이고 있으며, 북한은 중·러와의 연대를 통해 반미 전선을 강화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2. 북한 김정은 정권의 대남 정책 변화
김정은 정권 들어 북한은 남북관계에 대한 기본 입장을 근본적으로 변경하는 행보를 보여왔다. 과거 북한은 남북관계를 민족 내부의 잠정적 특수관계로 규정하고 통일을 지향한다고 주장했지만, 2023년 말부터 이러한 기조를 공개적으로 폐기하기 시작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023년 12월 노동당 제8기 9차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결정과 2024년 1월 최고인민회의 제14기 10차 회의를 통해 남북관계를 완전히 단절하겠다고 선언했다. 특히 당 중앙위 전원회의 보고에서 그는 “남북관계는 더 이상 동족 관계가 아니며, 현재는 전쟁 중인 두 교전국의 관계로 완전히 고착되었다”고 규정하고 “대한민국은 통일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못 박았다. 이어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는 대한민국을 “영원한 주적”으로 명명하고, 공식 담론에서 ‘통일’, ‘화해’, ‘동족’ 같은 단어를 아예 쓰지 말도록 지시했다.
김정은은 나아가 북한의 문학작품이나 구호에서도 “삼천리 금수강산”이나 “팔천만 겨레”와 같은 표현의 사용을 금지시켰다. 이는 남과 북을 하나의 민족 공동체로 묶는 어떤 상징도 더 이상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해석된다. 남북 협력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리겠다는 이러한 태도는, 앞으로 남측이 어떤 대화 제안을 하더라도 쉽게 응하지 않겠다는 강경한 입장으로도 읽힌다.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북한이 보인 첫 공식 반응은 2025년 7월 27일에 발표된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의 담화였다. 김여정은 이 담화에서 “서울에서 어떤 정책이 나오든 관심 없다. 한국과 마주 앉을 일도, 논의할 문제도 없다”고 못 박으며, 현재의 남북 대화 단절 상태를 당분간 지속하겠다는 뜻을 명확히 했다. 또한 이재명 정부가 취임 직후 실시한 대북 유화 조치들 — 대북 확성기 방송 중단과 대북 전단 살포 금지 — 에 대해 “애초에 하지 말았어야 할 일을 이제야 원상복귀시켰을 뿐”이라고 평가절하했다. 김여정은 새로 출범한 남측 정부도 이전과 다를 바 없이 맹목적인 “한미동맹 맹신”에 빠져 있다고 비판하면서, 향후 한미 연합군사훈련이 중단되지 않는 한 남북 대화 재개는 어려울 것이라고 압박했다.
이와 함께 북한 내부의 대남 담당 기구들도 변화 조짐을 보이고 있다. 과거 남북 대화를 총괄하던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와 노동당 통일전선부의 대남 기능은 사실상 마비되거나 군부로 이관된 것으로 관측된다. 조평통은 1961년에 창설되어 2016년 국무위원회 산하의 공식 국가기구로 격상된 바 있고, 남북 고위급 당국회담 등 공개적인 대화 창구 역할을 수행해왔다. 그러나 김정은 정권이 통일전선 전략 자체를 폐기함에 따라, 대화와 협상을 담당하던 조평통의 기능은 사실상 소멸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북한이 남북관계를 더 이상 대화나 협상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오직 군사적 목표 달성의 영역으로만 간주하겠다는 구조적 선언으로 볼 수 있다. 조선로동당 통일전선부 역시 대남 공작 부서로서의 기능은 유지되겠지만, 공개적인 대남 대화 기능은 상실된 것으로 보인다.
3. 이재명 정부의 대북·대미 정책 기조
2025년 5월 출범한 이재명 정부는 한반도의 평화 공존과 남북 상생 번영을 국정 운영의 중요한 축으로 삼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부터 “한반도 평화경제” 구상을 내세우며 남북 협력을 대한민국의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만들겠다고 공약했다. 그의 대북 공약에는 문재인 정부 시절 남북 간 합의들을 계승하여 남북 경제협력 재개, 개성공단 재가동과 금강산 관광 재개, 한반도 비핵화 로드맵 마련, 군사적 신뢰구축 등 실용적인 접근이 포함되었다.
집권 직후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격인 국정기획위원회에서도 남북 대화 채널 복원과 9·19 남북군사합의 이행을 최우선 과제로 천명했다. 이재명 정부의 대북정책 기조는 “실용주의 대북정책”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념이나 감정에 치우치기보다 현실적인 여건 속에서 실현 가능한 합의들을 하나씩 이끌어내겠다는 목표를 담고 있다. 실제로 이재명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상생의 평화경제를 통해 함께 잘사는 부강한 나라로 가겠다”고 밝히며, 남북이 함께 번영하는 길을 모색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이재명 정부는 출범하자마자 경색된 남북관계 복원 작업에 돌입했다. 가장 먼저, 문재인 정부 말기부터 끊어졌던 남북 간 공식 소통 채널을 다시 여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내세웠다. 이를 위해 2025년 6월 초 남북공동연락사무소 재가동을 북측에 제의하고 판문점을 통한 정례 연락 채널 복원을 요청했다.
윤석열 정부 시절 중단되었던 9·19 군사합의의 효력을 복원하는 것도 중요한 현안으로 떠올랐다. 이재명 정부는 남북 간 군사충돌 방지 장치로서 이 합의의 가치를 재평가하며 “선제적·단계적으로 9·19 군사합의를 복원해나가겠다”고 선언했다. 실제로 정부는 군사분계선 일대에 설치되었던 대북 확성기 방송 설비를 철거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러한 일방적 선제 조치들은 북한에 신뢰를 구축하자는 신호를 보내기 위한 것으로, 청와대는 “말이 아닌 행동으로 신뢰를 쌓아가겠다”는 원칙을 거듭 강조했다.
아울러 이재명 대통령은 남북이 이미 맺은 합의들을 최대한 존중하고 성실히 이행하겠다는 입장을 거듭 표명했다. 취임 직후 발표된 국정과제에서도 “기존 남북 합의 가운데 이행 가능한 부분은 즉시 실행한다”는 목표가 포함되었다. 이는 7·4 남북공동성명(1972), 남북 기본합의서(1991), 6·15 공동선언(2000), 10·4 선언(2007), 4·27 판문점 선언 및 9·19 평양공동선언(2018) 등 과거 역사적인 합의들의 연속성을 살려나가겠다는 뜻이다. 실제로 이 대통령은 취임 후 첫 광복절 경축사(2025년 8월 15일)에서 “남과 북은 서로의 체제를 존중하고 인정하되, 평화적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의 특수관계로 정립했다”며 남북 기본합의서의 정신을 환기시켰다. 또한 “우리 정부는 기존 합의를 존중하고 가능한 사안은 바로 이행할 것”이라고 천명하면서, 합의 이행 의지를 분명히 했다. 특히 이 경축사에서는 북한을 향한 세 가지 핵심 메시지를 공식화했는데, 그것은 ① 북한 체제를 존중한다, ② 어떠한 형태의 흡수통일도 추구하지 않는다, ③ 일체의 적대 행위를 용납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는 북한이 우려하는 체제 위협을 해소하고 신뢰 회복의 토대를 마련해 주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대미 외교 측면에서 이재명 정부는 한미동맹을 기반으로 남북관계 개선을 추진하겠다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2025년 8월 워싱턴에서 열린 이재명-트럼프 취임 후 첫 한미정상회담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한반도 평화의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해 줄 것을 요청하며, 북·미 정상회담 재개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트럼프 대통령도 이에 긍정적으로 호응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또한 “핵 없는 한반도는 평화로운 한반도의 전제조건”임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비핵화는 단기간에 해결할 수 없는 매우 어려운 과제”임을 인정하여 단계적 접근이 불가피함을 솔직히 밝혔다.
이재명 대통령은 2025년 광복절 연설에서 “싸워서 이기는 것보다, 싸울 필요가 없는 평화 상태를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역설하며, 군사적 긴장 완화의 가치를 강조했다.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전환과 관련해서도 임기 내에 가시적인 진전을 이루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후보 시절 그는 한국군이 주권 국가의 군대로서 당연히 전작권을 되찾아야 하며, 필요한 능력 배양을 빨리 마쳐 조기에 전환을 실현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러한 노력은 장기적으로 한미동맹을 보다 대등한 관계로 발전시키고, 향후 한국 정부가 남북 군비통제 협상을 주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이재명 정부의 대북정책은 국내적으로도 진보와 보수 진영 사이에 견해 차이가 큰 분야다. 따라서 정부는 정책 추진 과정에서 국민적 합의와 이해를 높이는 노력도 병행하고 있다. 예를 들어, 대통령은 2025년 6월 6·15 남북정상회담 25주년 기념식에 보내는 축사를 통해 “6·15 정신을 온전히 이어가는 것이 평화공존과 공동번영의 시작”이라고 강조했다. 이 축사는 대통령 비서실 정무수석이 대독했는데, 보수 야당 일각에서는 “이념 편향”이라는 반발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재명 대통령은 역사적인 남북 합의의 계승이 진영 논리가 아니라 대한민국 헌법 정신에 부합하는 일임을 강조하면서, 분열의 정치를 넘어 통합의 정치로 나아가자고 촉구했다. 실제로 그해 광복절 경축사에서 그는 “낡은 이념과 진영 논리에 기초한 분열의 정치를 탈피해야 한다. 대화와 양보로 연대와 상생의 정치를 함께 만들어가자”고 국민과 정치권에 호소했다. 이는 대북정책을 둘러싼 국내 분열을 치유하고, 지속 가능한 일관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행보로 보인다.
결국 이재명 정부의 대북정책은 과거 진보 정부의 유산을 계승하되 현실 여건에 맞게 실용성과 점진적 접근을 모토로 삼고 있다. 변화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도 한미 공조의 틀 안에서 남북관계의 돌파구를 마련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완강한 태도와 미·중 경쟁이라는 국제 환경의 제약 속에서 이러한 노선은 현실의 벽에 부딪힐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하고 추진력을 확보하기 위해 내부 동력을 지속적으로 강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4. 새로운 환경에서 이재명 정부의 과제
9·19 남북 군사합의 복원과 한반도식 신뢰 구축 장치
남북 간 군사적 신뢰 구축의 토대였던 2018년 9·19 남북 군사합의의 효력을 정상화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다. 이 합의에는 비무장지대(DMZ) 내 감시초소 시범 철수, 군사분계선 일대의 포병 및 군용기 사격훈련 중지, 서해 NLL 인근의 평화수역 조성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실제로 2018~2019년 한반도 긴장 완화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2020년 이후 남북관계가 악화되면서 이 합의의 일부 조치는 파기 위기에 놓였고, 2022년에는 남측에서 합의 효력 정지 주장까지 제기되었다. 이재명 정부는 군사합의 복원을 위해 우선 상대를 자극했던 대북 확성기 방송과 최전방에서의 무인기(UAV) 비행 등을 중단했다. 앞으로 남북 군 당국자 간 직통전화(핫라인) 복구와 군사공동위원회 재가동을 추진하여, 쌍방의 군사 활동을 실시간으로 협의·통제하는 체계를 마련하려 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의 바탕 위에 ‘한반도식 신뢰 구축 장치’를 정착시켜야 한다.
현재 북한이 남북관계를 ‘적대적인 두 국가’로 규정하며 군사화 노선을 강화하고 있어, 기존의 군사적 신뢰구축 조치(CBMs)를 당장 실행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따라서 이재명 정부는 군사 분야뿐 아니라 비전통적인 안보 영역까지 포괄하는 ‘한반도식 신뢰 구축 프로세스’를 확립해야 한다. 이 프로세스는 기후 변화 대응, 감염병 방역 협력, 북한 산림 복구 등 생명·안전과 관련된 초국경적 비전통 안보 분야에서 국제사회와 적극 협력하면서, 남북 간에는 우선 ‘저강도 협력’을 시작하자는 개념이다. 이는 남북 관계의 틀을 군사적 대결이나 단순 교류 협력에서 벗어나 생명·안전·생존 등 공동 과제 해결 중심으로 전환시키는 기반을 마련하고, 궁극적으로 군사적 신뢰 구축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다.
한반도 평화를 위한 사회적 대화 활성화
대북정책의 지속성과 성과는 국내 여론의 지지와 직결된다. 따라서 폭넓은 사회적 대화를 통해 국민적 공감대를 확산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대화의 장에서 남북이 공존하는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공유하고, 미래 세대의 지지까지 얻어낼 수 있는 평화 담론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대북 문제를 이념적 대립의 대상이 아니라 국가의 장기 발전 전략 차원에서 논의하도록 격상시켜야 한다. 사회적 합의가 뒷받침된다면 앞으로 정권이 교체되더라도 일관된 대북정책을 유지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될 것이다.
한미 연합훈련 조정과 전작권 반환 로드맵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풀어야 할 난제 중 하나는 대규모 한미 연합군사훈련이 빚어내는 군사적 긴장이다. 북한은 전통적으로 한미 연합훈련을 “침략 연습”이라고 규정하며 민감하게 반발해왔다. 향후 연례 대규모 연합훈련(UFS나 프리덤실드 등)의 시기나 규모를 북한과 협의하여 조정하는 방안을 고려해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앞서 언급한 한반도식 신뢰 구축 장치와 연계해 한미 연합훈련의 형태를 조정하는 방안도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전환은 남북 간 군비 신뢰 구축과도 맞물린 과제다. 한국군이 전작권을 행사하게 되면, 향후 남북 간 군사 합의 이행이나 한반도 군축 협상에서 한국의 자율성이 그만큼 커지게 된다. 이재명 정부는 임기 내 전작권 전환의 실질적 진전을 이루겠다고 공약한 만큼, 이를 뒷받침할 군사적 역량 강화에 주력하고 있다.
한반도 비핵화와 안보 균형 확보
북한 핵 문제는 남북관계 개선의 가장 큰 난관이다. 이재명 정부는 “핵 없는 한반도”를 한반도 평화의 전제 조건으로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 30여 년간의 교훈을 돌아보면, 완전한 비핵화를 이루기까지는 매우 오랜 시간과 복잡한 협상이 필요하다는 현실도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단계적이고 포괄적인 비핵화 로드맵을 마련하는 것이 과제로 떠오른다. 우선 북한의 핵·미사일 동결 조치를 끌어내는 1단계 협상이 이뤄져야 한다. 이 과정에서 미국을 비롯한 관련국들이 북한의 사실상의 핵 보유 상태를 일시적으로 인정하면서 군비통제 협정 형태의 합의를 모색하는 것이 핵심이 될 수 있다. 최종적으로 비핵화 목표를 달성하려면 새로운 남북관계 정립, 한반도에서의 적대 관계 종식과 평화체제 구축, 한반도식 신뢰 구축 장치 마련과 군축, 북·미 수교, 동아시아 지역의 집단안보 체제 형성 등 여러 과제를 병행 추진하는 긴 여정을 거칠 수밖에 없다.
최근 국내 일각에서 제기되는 전술핵 재배치나 자체 핵무장 주장에 대해 이재명 정부는 분명하게 선을 긋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한반도 비핵화 원칙에 반할 뿐 아니라 동북아 지역의 핵 군비 경쟁을 촉발시켜 오히려 안보 상황을 악화시킬 우려가 있다는 판단에서다. 대신 정부는 미국의 확장억제 공약을 실질적으로 강화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비록 국제 정세가 어려워도, 그리고 북한의 태도가 완강하더라도 “싸울 필요 없는 평화”를 만들기 위한 이재명 정부의 노선을 꾸준히 추진하면서 한반도 정세의 흐름을 변화시켜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이 정부가 직면한 과제이자 스스로 국민 앞에 약속한 책무이기도 하다.
5. 이재명 정부 대북정책에 대한 제언
국제정세 변화에 따른 능동적 전략
미·중 패권 경쟁 심화와 북·중·러 연대 강화라는 새로운 현실 속에서 한국의 대북정책은 보다 능동적이고 다변화된 외교 전략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 먼저, 전통적인 한미 동맹에 더해 미·중 갈등 국면에서 제3의 협력 네트워크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유럽연합(EU)과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등과의 협력을 강화하여 국제사회에서 한반도 평화를 지지하는 세력을 늘려야 한다. 한국은 중견국으로서 미·중 대결의 최전선에 서지 않도록 외교적 균형 감각을 유지해야 한다.
다음으로, 중국 및 러시아와도 일정 수준의 소통 채널을 지속적으로 유지하여 한반도 안보의 균형을 확보해야 한다. 현재 중국과 러시아가 대북 제재에서 이탈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만, 한국이 양국과의 경제·외교 관계를 성실히 관리한다면 한반도에서 발생할 수 있는 돌발 사태를 방지하고 평화체제 구축이라는 긴 여정에 필요한 초석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
북·미 대화 재개 지원과 새로운 남북관계 구축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 북·미 정상회담이 재개될 가능성에 대비해 한국은 사전에 철저한 전략과 시나리오를 준비해야 한다. 북한이 주장하는 ‘적대적 두 국가론’에 대해서는 원칙을 견지하되 유연한 접근을 병행해야 한다. 이재명 정부가 이미 “어떠한 형태의 흡수통일도 추구하지 않는다”고 밝힌 바 있지만, 이것이 영구 분단을 전제로 각자 갈 길을 가자는 뜻은 아니다. 남과 북이 서로의 체제를 현 상태 그대로 존중하면서도 통일 지향성은 장기 과제로 미루고 우선은 평화공존 관계를 구축하자는 것이다. 북한의 ‘두 국가론’을 둘러싼 논쟁에 매몰되기보다는, 장기적인 국가 전략 차원에서 남북관계의 새로운 좌표를 설정해야 한다. 다시 말해 남북관계를 하나의 중간지대 또는 점이지대로 정립하고, 이를 국가 전략 추진 과정의 일부로 인식해야 한다.
대북정책은 결코 고립된 영역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장기 국가 발전 전략과 궤를 같이해야 한다. 우선 남북관계 개선은 한국의 경제 발전 전략과도 연계될 수 있다. 이재명 정부가 강조하는 첨단산업 육성이나 AI 경제 강국 구상도 평화가 뒷받침될 때 비로소 실현 가능해진다. 2045년, 광복 100주년을 맞는 해에는 남과 북이 서로 발전된 역량을 바탕으로 평화공존과 공동 번영의 모델을 정착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이를 위한 구체적인 구상과 추진 전략을 마련하고, 실천 과정에서는 두 국가론에 대한 소모적인 논쟁 대신 남북 간 중간지대 또는 점이지대 모델을 구축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문화·공공외교를 통한 여론과 환경 조성이다. 국제사회에서 공공외교를 활발히 펼침으로써 다양한 무대에서 보편적인 공감대를 형성하고, 그렇게 조성된 공간을 활용해 북한과의 접촉면을 넓혀가야 한다.
문화·공공외교 (Cultural Public Diplomacy)
현재 이재명 정부는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거래적 동맹으로 인한 불확실성, 북·중·러 연대 강화, 북한의 핵을 활용한 강압 전략, 적대적 두 국가론의 부상, 북·미 대화 재개 가능성 등 복합적인 도전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교류 협력을 통한 사실상의 통일 추구나 한반도 완전 비핵화 등 전통적 접근의 실현 가능성이 낮아졌다. 더욱이 앞으로 북·미 대화가 본격화되면 한국의 외교적 입지가 좁아질 우려도 있다.
이런 환경에서 문화·공공외교는 한국이 국제사회와 협력하여 한반도 평화 정착에 유리한 국제적 환경을 조성하고, 그로써 마련된 공간에서 북한과의 접촉면을 확대하는 프로세스를 구축하자는 전략이다. 다시 말해 국제 협력과 문화 교류를 융합하여 대북정책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길을 개척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프로세스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북·미 간 접촉과도 연계하여 한국의 역할과 입지를 확보하고, 북한과의 접촉면을 지속적으로 넓히며, 궁극적으로 남북 대화를 국제 협력과 결부시켜 한반도에 굳건한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재명 정부의 대북정책은 한반도를 둘러싼 복잡한 지정학적 변화와 북한 내부 전략의 변화 속에서 방향을 잡아나가야 하는 어려운 임무를 안고 있다. 그러나 이재명 대통령이 광복 80주년 경축 연설에서 강조했듯이, 오랜 분단으로 지속되어 온 대결을 끝내고 평화공존과 공동성장의 새 시대를 열 수 있는 속도와 리듬을 만들어 가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