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부내륙고속도로를 달리며 차창 밖으로 울긋불긋 곱게 물든 산을 바라봤다. 나는 고속도로 달리기를 퍽 좋아한다. 계절마다 옷을 바꿔 입는 풍경 속에서 한 해의 흐름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남쪽으로 향할수록 따스해지는 바람의 온도를 만끽하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 하나에 마음이 가라앉았다. 남해 건너에도 단풍이 피었을까. 1945년 8월, 전례 없는 핵폭탄으로 폐허가 된 히로시마에도 가을이 찾아왔을까. 누군가에겐 어제처럼 생생할 그날의 기억에, 마음 한편이 서늘해졌다.
네 시간 남짓 달려 도착한 합천 원폭 자료관은 고요했다. 직원은 단 여섯 명의 방문객에게도 환대를 아끼지 않았다. 띄엄띄엄 적힌 방명록을 읽으며 환대의 이유를 찾다가, 뒤늦게 등장한 노신사의 걸음을 좇아 전시관으로 향했다.
합천은 ‘한국의 히로시마’라고 불린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당시 히로시마에 거주한 조선인 중 상당수가 합천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연명해야 했던 그 시절 사람들은 굶주림을 피해 반강제적으로 일본으로 향했다. 그러나 일본에서의 삶도 녹록치 않았다. 피식민 국민이 식민국가의 땅에서 하층민으로 산다는 것은 모욕과 차별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1945년 8월 6일. 한나 아렌트의 말처럼, 히로시마 상공에 떨어진 ‘리틀보이’는 그 자체로 죽음, 모든 삶의 조건을 파괴했다. 당시 히로시마에 거주한 조선인은 약 10만 명이었는데, 절반은 즉사했으며 산 사람도 살아있는 것이 아니었다. 벽에 걸린 사진 속 여자아이의 눈빛이 잊히지 않는다. 죽은 어미 앞에 주저앉아 슬픔도, 괴로움도 찾을 수 없는 텅 빈 표정. 어쩌면 핵무기가 종결시킨 것은 전쟁이 아닌 인간적인 무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피폭 피해자들의 괴로움은 멎지 않았다. 잘못된 민간요법을 행하다가 상처가 더욱 곪기 일쑤였고, 후유증은 자녀와 손주 세대로 이어졌다. 대다수의 피해자들은 낙인과 차별을 피해 자신의 고통을 삼킨 채 벙어리가 되기를 택했다. 어째서 우리 정부는 이들을 안아주지 않았을까. 80년이 흘렀지만 국가는 이들의 희생에 대해 위로도, 보상도 공식적으로 하지 않았다. 국가 수립 및 전후 복구 과정에서 피폭자 문제는 자꾸만 뒤로 밀려났다. 그럼에도 살아남은 이들과 그들의 2세는 흐릿해지는 역사에 맞서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원폭피해자지원특별법’을 발의하고, 일본 정부에 보상을 요구하는 등 세월에 맞서 꿋꿋이 버텨왔다.
그 결과, 문재인 정부 시절에는 현재 자료관 부지에 기념관 설립 지원을 약속받기도 했다. 그러나 정권이 바뀌며 추진은 무산되고 말았다. 오랜 시간 기억을 세우려는 노력은 이렇게 또 한 번 1945년이 멈춰 서야 했다.
돌아오는 길, 어둑한 하늘 아래서 생각에 잠겼다. 우리의 현대사는 그 시절 사람들에게 이토록 잔혹해야만 했던가. ‘지금은 어렵다’, ‘잠시만 기다려달라’는 말 뒤에 얼마나 많은 슬픔이 밀려났던가. 그렇게 고통은 대중의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 결국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이름으로 사라지고 있다.
“연민은 변하기 쉬운 감각이다. 이런 감정은 곧 시들해지는 법이다. (…) 만약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면, 그리고 ‘그들’이 할 수 있는 일도 전혀 없다고 느낀다면, 사람들은 금방 지루해하고 냉소적이 되며, 무감각해지는 것이다.” - 수잔 손택, 『타인의 고통』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어쩌면 나도 이 잔혹함에 무뎌진 사람은 아니었을까. 현실적인 조건을 내세워 어쩔 수 없다는 말로 불편한 역사를 뒤로 미뤄온 건 아닐까.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의 투쟁 속에서 한반도의 평화를 떠올렸다. 누군가의 아픔을 묻어둔 땅 위에 평화가 자랄 수 있을까. 진정한 평화를 위해 우리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더 나은 미래’라는 허황에 현혹되지 말아야지. 서울로 향하는 길목에서, 오랜만에 북한 연구자로서 소명을 고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