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대통령이 한반도평화를 위해서 노력한다면 그 노력이 미국의 국익에 좋은 보탬이 되어야 한다. 종전선언을 하고 현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는 안이나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를 해제하는 안이나 모두 미국의 국익에 부합해야 한다. 비핵화를 한사코 거부하는 북한과 이와 같은 합의를 하는 것은 북한이 뉴클리어 파워라고 인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으며 비확산체제를 존중하는 미국의 국익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처럼 무거운 과제가 아니더라도 남북관계가 개선되어서 한반도평화가 실질적으로 크게 증진되는 것조차 미국의 국익에 긍정적이지 않다. 한반도의 불안정한 상황은 한국 정부가 군사적, 경제적으로 미국에 더욱 의존하게 만드는 근원이자, 미국의 동북아시아 정책 추진을 수월하게 만드는 윤활유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전통적으로 한반도에서 안정을 추구하는 세력(stabilizer)이지 누군가를 대신해서 또는 누군가를 위해서 평화를 추구하는 세력이 아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과 다시 만나기 전에 한반도 현상 변경을 위해 연구하면 할수록 한반도의 불안정한 현 상황이 미국의 국익에 최적화되어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한반도의 현 상황이 미국의 국익에 어떻게 기여하는지에 대한 필자의 상세한 분석은 『통일뉴스』 기고문 “미국의 국가젼략과 한반도” 2023.9.7. 참조). 미국은 한반도에서 현상 변경을 원하지 않는다.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개인적으로 호의적이더라도 지도자 간 친밀한 관계가 국익 양보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강압외교 국제정치학의 연구 결과다.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을 다시 만날 수는 있어도, 그리고 어떤 합의를 할 수는 있어도 북한이 비핵화에 나서지 않는 한 그 합의가 실질적으로 한반도의 현상 변경을 가져오지는 않을 것이다.
남북관계 개선과 한반도 평화증진의 과제는 우리 힘으로 자주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이재명 대통령은 ‘국방은 우리 스스로 해야 하며 어딘가 의존해야 한다는 생각은 납득하기 어렵다.’라고 말했다. 한반도 평화증진의 과제도 마찬가지다. 미국 대통령에게 피스메이커 역할을 부탁한 다음에 소출을 수확하려는 생각은 난센스다.
이재명 정부의 대북 정책은 성과를 거둘 수 있을까? 현 정부의 정책은 END로 표현된다. E(exchange, 교류, 협력), N(normalization, 북미 관계정상화), D(denuclearization, 비핵화)를 포괄적으로 추진하면서 진전을 보이는 분야에 더욱 집중하겠다는 구상이다. 국내 보수세력은 END의 병행 추진에 대해 비핵화 전에 북미 수교가 먼저 이루어지면 북한의 핵무기 보유가 공고해질 수 있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그런 우려를 할 필요는 없다. 미국 정계와 학계의 주류가 비핵화 전에 북미 수교를 용인할 가능성은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들의 사고를 더 깊이 파고들면 북한이 비핵화를 하더라도 체제변화와 인권개선이 진전되기 전에는 수교할 수 없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
N과 D가 어렵다면 E는 진전될 수 있을까? 진전 가능성을 파악하려면 우선 북한의 대남정책을 살펴보아야 한다. 북한은 한반도에 적대적 두 국가가 존재한다고 언명했으며, 남북 간의 교류, 협력은 더이상 없다고 선언했다. 문재인 정부의 비자주적 태도를 겪어본 북한은 교류, 협력의 완전한 거부 판단에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2019년 1월 독감 치료제인 타미플루 20만 명분을 북한에 인도적 견지에서 지원하기로 했다가 미국이 북한에 약을 싣고 가서 잠시 체류할 트럭이 대북 제재대상이라고 지적하자 지원을 보류했다. 그리고 2월에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이 노딜로 종결되자 평양에서 합의한 철도, 도로 연결 등 남북 협력사업을 중단했을 뿐만 아니라 그 외에 남북 간에 합의한 교류, 협력 항목 추진에 도무지 나서려고 하지 않았다. 소위 진보정권의 모습이 이토록 비자주적인데 앞으로 한국 정부와 무엇인가 합의하고, 실행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교류, 협력이 오히려 인민에 ‘자본주의풍(風)’ 오염의 해악만 끼치는 정책으로 여겼을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 연설과 김여정 부부장의 담화에서 나타나는 한국 정권에 대한 정서는 ‘절대적 실망’과 ‘냉소’이다. 이런 상황에서 교류, 협력이 가능할까? 윤석열 정부는 ‘담대한 구상’으로 교류, 협력의 문을 열어보려고 했다. 과감한 대북 지원 의사를 밝힌 그 구상은 북한이 비핵화 결심을 먼저 하고 대화 탁자에 앉아야 한다는 전제가 달려 있었다. 윤석열 정부의 대북 정책은 3년 내내 가게 문을 열어놓고 손님이 오기를 기다리는 ‘개점 휴업’ 상태였다. 비핵화를 결심하고 나서 물건을 고르라고 하니 사실상 살 물건 없이 가게 문을 연 것과 다름없었다. 이재명 정부는 전제조건 없이 가게에 들어오라고 하니 ‘개점 휴업’ 상태를 면할 수 있을까? 정부는 대북 전단 살포 중단, 전방 확성기 선제적 철거 등의 조치를 했다. 꿈쩍도 하지 않는 북한을 향해 신뢰 회복을 위한 노력을 꾸준히 하다 보면 언젠가 진심이 통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과연 그렇게 될까? 북한의 교류, 협력 거부 입장은 한국 정권이 보수이건 진보이건 비자주적이라는 인식의 토대 위에 형성되어 있다. 김여정 부부장은 새로 들어서는 정권마다 남북관계를 개선하겠다고 ‘구상’과 ‘희망’을 내세우고 자신의 정책을 자찬하는데 그것이 남쪽 지방의 ‘풍토병인가 보다’라고 평했다. 더군다나 북한은 현재 교류, 협력과는 반대 기류인 신냉전의 국제정세 속에서 혜택을 보는 중이다. 이재명 정부의 대북 정책 역시 가게 문을 열고 상품을 늘어놓았으나 보러 오는 사람이 없는 ‘개점 휴업’ 상태를 장기간 면하기 어려울 전망이다. 지금처럼 신뢰 회복을 위해 이런저런 조치를 해 나가는 것으로 남북관계 개선은 정녕 무망한 노릇일까? 필자는 그렇다고 본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전쟁이 끝나고 혹여 신냉전 기류의 국제정세가 변화하여 북한이 남북대화에 나서면 그때 가서 오랫동안 공들인 신뢰 회복의 진심이 통했다고 주장할 일은 아니다.
그렇다면 한국 정부는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일 수 있을까? 우발적 무력 충돌 방지를 위한 9·19 군사합의를 선제적으로 복원하는 조치는 어떨까? 북한이 이에 반응하면 다행이겠지만 북한도 어차피 무력 충돌을 피하려고 노력하는 만큼 정부의 조치에 ‘그러거나 말거나’의 냉소 이상의 반응을 얻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남북관계 개선을 도모하려면 우회하지 말고 북한의 관심사를 직접 다루는 것이 좋다. 그리고 그 관심사는 북한 비핵화와 연결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필자는 그러한 관심사로 북한이 중단을 요구하는 한미 연합훈련의 축소 조정을 검토해 볼 수 있다고 본다. 축소의 정도는 한미가 자평하는 수준이 아니라 북한이 ‘유의미한 변화’라고 인정할 정도의 수준이어야 한다. 사실 이것은 매우 난망한 과제이다. 왜냐하면 한미 연합훈련에는 많은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몇 가지만 열거하면 북한 비핵화 결단 강압 수단, 북한 ‘도발’ 억지 수단, 한반도 긴장 조절 수단, 바다, 평지, 산악지대가 어우러진 천혜의 훈련 공간에서 미군에 훈련 경험 제공 등을 들 수 있다. 한미 연합훈련을 큰 폭으로 축소하면 북한에 커다란 이익이 된다. 왜냐하면 유사시를 상정하고 작전계획에 따라 치열하게 수행한 훈련은 유사시에 그대로 실력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안보는 만에 하나 가능성에도 대비하는 것이기에 한미 연합훈련 중 우발적 또는 고의적 무력 충돌 가능성은 북한에 항상 커다란 긴장 상태를 유발한다. 한미 연합훈련의 큰 폭 축소는 현 정부가 자주적 태도로 미국과 협의하지 않고서는 합의하기 어려울 것이다. 북한도 반대급부를 제공해야 한다. 이를테면 핵실험과 장거리탄도미사일 시험 발사 중단 등이다. 핵실험 경우 북한이 2017년 6차 핵실험 이후 더는 진행하지 않고 있더라도 반대급부로서 가치는 자못 크다. 북한이 국제정세와 주변국과의 관계를 고려해 핵실험을 늦추고 있으나 핵실험의 필요성은 핵능력 고도화에 따라 7차, 8차 등 계속 제기된다. 핵실험 없이 개발 검증이 여의치 않기 때문이고 핵무기 실전배치를 제약하기 때문이다. 장거리탄도미사일 또한 마찬가지로 검증을 거친 후 실전 배치해야 한다. 장거리탄도미사일 고도화는 한국인이 미국의 확장억제 의지를 의심하게 만들고 한미동맹의 신뢰를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남북 합의의 첫발을 떼면 두 번째 합의는 좀 더 수월해질 것이다.
남북관계의 현주소는 매우 험난한 지경에 와있다. 현 정부가 한반도평화를 증진하려면 피스메이킹(peacemaking)을 트럼프 대통령에게 의탁하지 말고 과제를 선정해서 미국에 자주적으로 요구하고, 북한과 협상하여 피스메이커가 되어야 한다.
※ 본 글은 '통일뉴스'에도 게재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