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에 코리아연구원 이사이신 김창수 前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사무처장께서 10월 21일 통일전망대에서 진행하신 인터뷰 기사가 연재되었습니다. 새로운 남북관계의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좋은 내용을 담고 있어 이번 주 뉴스레터로 보내드립니다.
---------------------------------------------------------------------------------------------------------------------------------------------------------------------------------------------------------------------------------------
민화협 시절 "국보법 전력자의 첫 합법 방북"
― 민화협 시절은 운동에서 행정으로 옮겨가는 전환점에 해당합니다. 당시 주요 경험을 말씀해 주세요.
1998년 민화협이 만들어지고 정책실장을 맡았습니다. 당시 남북 간의 비료 지원이 본격화 때였어요. 전국에서 모금한 비료를 배에 실어 여수에서 남포로 보냈고 제가 그 배에 직접 탔습니다. 3박 4일 일정이었습니다. 국가보안법 위반 전력이 있는 사람이 합법적으로 북한을 방문한 첫 사례였습니다. 통일부에서는 '보냈다가 귀국하지 않으면 어떡하느냐'고 걱정했다는데 담당 사무관이 '그럴 사람 아니다'고 직접 보고서를 써서 승인을 받아줬습니다.
도착한 남포항의 숙소는 '외국인 구락부'였는데 밖으로는 나갈 수 없었습니다. 밤이 되니까 '통일운동 하는 사람이 여기 와서 갇혀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북측 인사들이 있는 숙소로 찾아가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그 자리에서 통일의 방식과 대중의 역할에 대해 토론을 벌였습니다. 저는 그 내용을 그날 밤 수첩에 적어 두었고,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귀환 후에는 '국보법 전력자가 합법적으로 북한을 다녀왔다'는 사실이 화제가 됐습니다. 돌아보면 그 시기의 민화협 활동이 이후 청와대 통일비서관 시절보다 훨씬 실질적인 남북 교류 경험이었습니다. 민간 차원의 협력, 실무 교섭, 대북 지원 절차를 직접 겪으며 '남북 교류는 제도보다 신뢰가 먼저다'라는 걸 체감했습니다.
청와대 참모들 "전투병 파병하면 사표 내자"
― NSC 행정관으로 첫 공직을 시작합니다. 운동에서 행정으로 옮겨갔을 때,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이었습니까?
운동과 달리 행정은 신념에 앞서 절차와 책임이 있었습니다. 간극을 가장 뚜렷하게 느낀 게 이라크 파병 문제였습니다. 당시 청와대 안에서도 젊은 참모들끼리 '전투병을 파병하면 사표를 내자'는 이야기가 돌았습니다. 저도 그 대화에 있었고요. 모두가 고민했습니다. 결국 정부는 '전투병이 아닌 비전투병만 파병한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사표를 내진 않았지만 마음은 무겁고 복잡했습니다.
그 무렵 저는 대학로에서 열린 '전투병 파병 반대 집회'에도 나갔습니다. 그냥 서서 사람들의 구호를 들었습니다. 안에서는 행정의 언어로 보고서를 쓰고, 밖에서는 여전히 운동의 언어로 외치는 사람들을 봤죠. 그 두 세계의 차이가 너무 크게 느껴졌습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운동의 언어는 옳고 그름을 나누는 힘이 있지만, 행정의 언어는 그 옳음을 현실 속에서 구현해야 하는 책임의 언어라는 걸요. 저는 그 두 언어 사이를 오가며 배웠습니다. 신념은 그대로지만, 그걸 표현하는 방식과 책임의 무게가 달라질 뿐이라는 걸 말입니다.
노무현 정부 포괄안보 "평화를 안보의 일부로 넣은 시기"
― 노무현 정부 시절 NSC는 어땠습니까?
이전 정부의 NSC는 군사 중심의 조직이었습니다. 안보라고 하면 군대, 전쟁, 위협 같은 단어가 먼저 떠올랐죠. 그런데 노무현 정부는 그 틀을 완전히 바꿨습니다. 안보를 단순히 군사 문제로 보지 않고, 국민의 안전과 평화를 포함한 '포괄안보' 개념으로 확장했습니다. 참여정부 시절 NSC 사무처 중심으로 위기관리 기능을 상시화했고, 이후 정권에서 '국가위기상황센터' 등으로 재편됐습니다.
또 이전의 NSC는 이름만 있었지 실질적으로는 돌아가지 않았는데, 노무현 정부는 사무처를 정식으로 설치했습니다. 외교부, 국방부, 통일부, 국정원 사이의 협업을 조정하고, 통일부 장관이 상임위원장을 겸직하도록 했죠. 저는 그 변화를 현장에서 보며 '이제 평화가 안보의 일부로 들어왔다'라고 느꼈습니다.
"대통령님, 여섯 가지 중대한 문제점이 있습니다"
― 청와대 NSC 행정관으로 노무현 대통령을 가까이서 경험했을 텐데 어땠습니까?
2003년 봄 노 대통령이 첫 방미를 마치고 돌아온 직후였어요. 점심 시간쯤 이종석 차장이 저를 부르더니 '대통령께 방미 결과를 보고해야 하니, 생각을 정리해 회의 때 발언하라'고 했습니다. 당시 청와대의 특징 중 하나가, 저 같은 말단 행정관까지 회의에 참여시켜서 토론하게 했다는 점입니다. 자리에 앉자마자 이종석 차장이 저더러 발언하라고 해서 말했습니다. '이번 방미에는 여섯 가지 중대한 문제점이 있습니다.' 회의장이 순간 조용해졌습니다.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은 제 말을 끝까지 들으셨어요. 잠시 생각하신 뒤에 '그래요, 그런 점이 있었지'라고 담담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아, 대통령이 듣는 사람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운동권 시절의 직설적인 습관이 그대로 남아 있었는데, 그걸 받아주는 리더십이 있었던 거죠.
청와대에 들어가서도 '운동권 물이 안 빠졌다'는 말을 들을 만큼, 그때까지도 현실보다는 신념의 언어로 말하던 때였습니다. 하지만 그 경험 이후 처음으로 알게 됐습니다. 행정의 세계에서는 신념보다 책임이 앞선다는 것을요. 노무현 대통령은 저를 꾸짖지 않았어요. 다만 '이제는 대통령으로서 평화를 관리해야 한다'고 하시더군요."
남북정상회담 지연은 북한 홍수 때문
― 2007년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된 과정과 의미를 어떻게 보십니까.
"노무현 정부가 출범했을 때 2차 북핵 위기가 다시 시작됐습니다. 미국이 북한의 고농축우라늄 문제를 제기하면서 상황이 급박했죠. 2007년 6자회담에서 2·13 합의가 이루어지자 남북정상회담 이야기가 다시 나왔습니다. 원래는 8월에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북한 지역에 홍수가 나서 미뤄졌습니다. 이명박 정부 들어 이를 '선거용'으로 규정하고 10·4 선언을 부정했지만 사실은 홍수 때문이었지요.
10월 열린 평양 회담에서 가장 중요한 합의가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였습니다. 서해는 교전이 반복되던 지역이었는데, 그걸 평화와 협력의 공간으로 바꾸자는 거였죠. 저는 그 합의가 당시의 남북관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남북이 대결의 구도를 풀고 평화의 구도로 옮기려 한 첫 시도였어요. 그때의 노력들이 이후 판문점 선언으로 이어졌고요."
CDM·온실가스 협력 시도, 제2의 흑금성 될 뻔
― 10·4 선언 이후에도 북측과의 접촉이 있었습니까?
"노무현 정부 말에 민주평통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입니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이 끝나고 얼마 안 돼서 북한 통전부 쪽 인사한테 갑자기 전화가 왔습니다. 남북협상 때 문제 생기면 풀어주는 해결사 같은 인물이었는데 저한테도 늘 '같이 할 수 있는 사업 없냐'고 물었어요. 그래서 제가 그때 관심 있던 CDM(청정개발체제) 온실가스 감축사업을 제안했습니다. '대동강 물이 그냥 흘러가면 아무 소용이 없지만, 수문을 열고 발전기를 돌리면 돈이 된다. 온실가스 감축사업도 그런 구조'라고 말해줬습니다. 북측 실무자가 그 말을 듣고 크게 고개를 끄덕이더군요.
2008년 초 이명박 정부 들어서까지 직접 차 몰고 개성까지 가서 북한의 온실가스 전문가들과 만났습니다. 유엔환경계획(UNEP)에서 교육받은 인사들도 파악해서 소개했고, 결국 5단계 협의안(전문가 회의, 현장조사, 시범사업 등)까지 합의를 봤어요. 흥미로웠던 건 북한 사람들이 '평양 공기를 맑게 하는 게 목표'라며 동평양 화력발전소 개보수를 언급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6자회담과 의제 충돌을 우려해 탄광과 환경개선 사업으로 방향을 바꿨습니다.
서울에 돌아와서 청와대에 보고했지만, '지난 정권 사람이 너무 나서지 마세요'라는 말이 돌아왔습니다. 그 뒤 정보기관 쪽에서 '페이퍼컴퍼니를 만들어서 같은 사업을 이어가자'는 제안을 받았는데 거절했습니다. 흑금성 같은 일이 될 수 있다고 봤어요. 공직에 남아 있으면 그런 제안이 반복될 것 같아서 정리하고 미국으로 나갔습니다. 결국 사업은 성사되지 않았지만, 남북이 환경 문제를 같이 다뤄본 첫 경험이었습니다. 공기와 물은 남북이 따로 있을 수 없다고 느꼈어요."
서울 찍고 워싱턴, 남북 간 회담 뒤 술자리 사라져
― 문재인 정부 초기 통일부 장관 정책비서관(2017년 5월~2018년 7월)으로 일했습니다. 이 시기 남북관계는 어땠습니까?
"2018년 4·27 판문점 선언 이후 6월 초 1차 남북 장관급 회담에 참석해 민간 교류 재개를 의제로 올리려 했지만 북측은 아예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김정은의 전략은 '탑다운(top-down)'이었습니다. 서울을 거쳐 워싱턴으로 직행하겠다는 전략이었고, 민간 교류는 우선순위에서 빠졌습니다. 이후 북한은 과거 남측 민간단체(6·15남측위, 민주노총, 민화협 등)를 한 차례씩 평양으로 초청해 상징적 교류로 정리하고, 본격적으로 북미 직접 대화로 전환했습니다.
분위기도 예전과는 달랐습니다. 김대중·노무현 시절에는 회담 뒤 식사나 술자리로 이어지며 인간적인 친밀감이 쌓였는데 그때는 달랐습니다. 예전처럼 비공식 접촉으로 친밀감을 쌓는 분위기는 사라지고, 북측은 철저히 성과 중심으로 움직였죠. 그 변화를 현장에서 실감했습니다."
"이르지 마십시오. 실수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 개성공동연락사무소 초대 사무처장(차관급)으로 근무하셨습니다. 북한 사람들 많이 보셨을 텐데 어땠습니까?
"월요일에 출근해 금요일에 퇴근했습니다. 아마 그때는 남한에서 북한을 가장 여러 번 간 사람이었겠죠. 남북은 서로를 국가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출입국'이 아니라 '출입경(出入境)' 사무소라고 했습니다. 개성으로 갈 때는 남측 출입경 사무소를 지나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측 출입경 사무소로 들어갔습니다.
어느 날 북측 관리가 우리 여직원의 나이를 물었어요. 제가 웃으면서 '몇 살쯤 돼 보이느냐'고 되물었더니, 그 사람이 '50쯤?'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40인데 일러버린다 그랬더니 얼굴 빨개져서 '이르지 마십시오.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막 그러는 거예요. 다음날 그 여직원이 북측 관리의 어깨를 꼬집으며 '왜 그런 말 했느냐'고 하니, 그 관리가 아무 말도 못 하고 어쩔 줄 몰라하더라고요. 북한 사람들은 굉장히 순박한 게 있어요.“
'공정' 논란이 '감동'으로 끝나다
― 2018년 평창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 논란을 어떻게 보셨습니까.
"그때 남북 단일팀 결정이 워낙 갑작스러웠죠. 1월 9일 장관급회담에서 전격 합의가 나왔고, 여자 아이스하키팀은 그때 해외 원정 중이었습니다. 귀국하자 외국인 감독이 '사전 논의는 없었지만 단일팀을 환영한다'고 말했는데 언론은 앞부분만 크게 보도했어요. '사전 협의가 없었다'는 문장만 따서 불공정 논란이 커졌습니다.
당시 여론조사를 보면, 올림픽 직전 부정 평가가 높았다가 대회 후에는 긍정 인식이 유의미하게 개선됐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특히 20대가 가장 크게 변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실제 경기와 선수들의 교류를 직접 보면서 마음이 움직였기 때문이죠.
북한 선수단이 장비가 없어 남측 선수들이 스틱을 나눠주고, 서로 생일을 챙기며 노래를 가르쳐 주는 장면들이 매일 보도됐습니다. 사람들은 그걸 보면서 '같은 핏줄이구나' 하고 느낀 것이지요. 그때 한국 코치가 저한테 한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정부가 우리를 만나게 해줬지만,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 이별을 강요했다'는 것이었어요.
이후 김여정·김영철 등 북측 고위 인사의 방한 보도가 집중되면서 이러한 여론 반전은 거의 주목받지 못했지만 그때 저는 확신했습니다. 체험과 감정이 추상적인 가치보다 훨씬 큰 힘을 가진다고요. '공정'이란 말로 시작된 논란이 '감동'으로 끝났습니다. 통일 논의도 이성과 논리만으로는 어렵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같이 웃고, 같이 경기하고, 같이 노래할 때 생각이 바뀌는 겁니다."
하노이 회담, CNN 보던 직원이 결과를 예감
― 하노이 북미정상회담(2019년 2월) 때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그때는 연락사무소에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 여성 직원이 와서 '무서워서 잠을 못 잤다'고 하더군요. 밤새 CNN에서 마이클 코언 청문회를 봤다는 겁니다. 트럼프의 개인 변호사였던 코언이 비리를 폭로하던 그날이었죠. 그 직원이 '트럼프의 몸은 하노이에 있지만 마음은 워싱턴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처음엔 제가 '아침부터 초 치지 말라'고 웃어넘겼는데, 나중에 보니 그 말이 딱 맞았습니다. 트럼프는 이미 워크아웃을 결정해놨습니다. 참모들에게 '스몰딜로 합의하는 게 충격이 클까, 노딜로 퇴장하는 게 클까'를 물었다고 합니다. 표면적으로는 존 볼턴의 강경 개입이 회담을 망친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트럼프의 정치적 계산이 더 큰 요인이었습니다. 워싱턴의 코언 청문회 스캔들을 덮기 위한 판단이었죠. 그때 생각했습니다. 하노이 결렬의 진짜 이유를 가장 먼저 알아차린 사람은 CNN을 보던 그 여직원이었구나."
하노이 이후 김정은, 고르바초프에서 스탈린으로
―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남북관계는 어떻게 변했습니까. 그리고 그 시기를 어떻게 받아들이셨나요.
"하노이 회담이 끝난 뒤 남북관계는 완전히 멈췄습니다. 남북관계가 가장 높은 수준까지 올라갔다가 추락한 것이지요. 그건 성취이자 상처였습니다. 당시 통일정책비서관으로서 큰 책임감을 느낍니다. 어떤 변명도, 회피도 없이 일을 맡았던 우리가 그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노이 이후 북한 내부도 급격히 달라졌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협상장을 떠난 뒤 김정은 위원장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같은 해 10월, 백두산에 백마를 타고 두 번 오르며 상징적인 메시지를 냈습니다. 김일성의 항일신화를 재현한 '혁명서사 복원 연출'이었죠. 하노이 이전의 김정은이 '개방의 고르바초프'였다면, 이후의 김정은은 '봉쇄의 브레즈네프, 스탈린'으로 변했습니다.
그 뒤로 김 위원장은 '웅대한 작전(2019~2024)'을 내세워 군사력 강화, 자립경제 확충, 대미 의존 탈피를 선언했습니다. 그 흐름이 지금의 미사일 고도화, 원산갈마지구 건설, 핵전력 강화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노이의 결렬은 단순한 회담 실패가 아니라, 북한 체제의 방향이 완전히 바뀌는 분기점이었습니다."
하노이 실패 후에도 남북 간 친서 주고받아
―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부를 거쳐도 남북관계가 결국 멈춘 이유는 뭐라고 보십니까.
"첫째, 장기 비전이 없었습니다. 김대중 정부 이후 6·15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고, 금강산 행사며 6·15 1주년 기념행사까지 활발했죠. 그때는 다 잘 되는 줄 알았습니다. 장기발전전략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중국도, 베트남도, 북한도 (장기발전전략이) 다 있습니다.
둘째, 정책의 연속성이 없었습니다. 5년마다 정권이 바뀌니까 대북정책이 계속 끊겼습니다. 계승이 안 됐습니다.
셋째, 남북문제가 늘 이념 논쟁의 최전선에 서 있었습니다. 조금만 진전돼도 남남갈등이 생기고, 갈등이 커지면 남북관계도 멈췄습니다.
여기에 하나를 더 보태자면, 한반도 문제가 지나치게 국제화돼 있다는 점입니다. 하노이 회담이 깨지고 나서도 김 위원장은 문재인 대통령과 친서를 주고받았습니다. 굉장히 공손하고 따뜻하게요. 정확하지는 않지만 두 가지 말이 자주 등장했어요. '우리 힘으로 하기에는 국제적 벽이 너무 높다', '우리 힘이 부족했다.', 두 가지에요. 그 뒤 김 위원장은 자력갱생으로 나아갔고요."
트럼프와 김정은, 두 정상의 평행한 꿈
― 올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때 김정은과 트럼프가 만날까요.
"올해 10월 북한 노동당 창건 80주년 때 김정은은 '우리가 이만큼 했다'는 걸 이미 보여줬어요. 내년 9차 당대회에서 그걸 마무리할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성과를 정리하는 시기지 회담을 열 시기는 아닙니다. 물론 트럼프가 갑자기 만나자고 하면 예외적인 상황이 생길 수는 있겠죠."
하노이 이후 두 사람의 길은 완전히 갈라졌습니다. 트럼프는 이번 한미정상회담에서도 북한 이야기만 했어요. '평창올림픽은 내 덕분에 성공했다'고 자랑하고, 'LA올림픽(2028)을 제2의 평창으로 만들겠다'고 했습니다. 반면 김정은은 원산갈마 개발과 핵·미사일 강화로 '백두산 신화'를 완성하려 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평창 신화', 하나는 '백두산 신화'를 쫓는 셈이죠. 저는 그걸 두 정상의 '평행한 꿈'이라고 부릅니다.
이제 문제는 우리입니다. 북한은 내년 당대회 이후 몸집이 커졌다고 느낄 테고, 몸값을 세게 부를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걸 감당할 돈이 없어요. 그래서 이재명 대통령이 말한 '미국이 피스메이커, 한국이 페이스메이커'라는 구상이 중요합니다."
세 대통령의 통일철학, 결과보다 과정
―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세 대통령의 통일 철학은 어떻게 달랐습니까.
"세 분 다 평화를 지향했지만 접근 방식은 달랐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큰 틀을 만든 사람이에요. 오랜 정치 경험을 바탕으로 6·15 정상회담으로 문을 열었죠. 노무현 대통령은 그 틀을 제도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NSC를 정상화하고 '포괄안보'라는 개념을 넣은 게 그 시도였죠. 문재인 대통령은 다시 사람과 감정으로 돌아왔습니다. 평창 단일팀, 남북 정상회담의 포옹, 백두산 공동 등정 같은 장면들이 그랬습니다.
제가 보기에 김대중은 틀(구조), 노무현은 제도, 문재인은 감정이었습니다. 서로 다른 길이지만 결국 하나의 축을 이뤘죠. 세 분 모두 통일을 '결과'가 아니라 '과정'으로 이해하셨다는 점에서는 같았습니다."
노련한 상대, 충돌하는 파트너, 따뜻한 안내자
― 세 분 대통령이 북한 수뇌부, 그러니까 수령과 맺은 관계는 어떻게 달랐습니까.
"확실히 다릅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훨씬 연장자였고, 김정일 위원장도 국가를 오래 운영한 아주 노련한 사람이었죠. 그래서 두 사람의 만남은 노련한 지도자들끼리의 관계였어요. 노무현 대통령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학습 능력이 워낙 뛰어나서 집권 2~3년 차쯤 되면 다자회의나 정상회담에서 의제 전체를 장악했어요.
그런 노무현 대통령이 노회한 김정일을 만나 부딪히지 않을 수 없었죠. 실제로 '자주' 문제를 두고 격하게 논쟁했고, 회담이 깨질까 싶을 정도였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이거 안 되면 돌아가 버릴까' 생각할 만큼 치열했어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은 또 달랐습니다. 처음의 김정은은 제가 생각할 때 '소년소녀 가장' 같았어요. 막 지도자로 나왔지만 미숙했고, 문재인 대통령은 너무 포근한 이웃집 아저씨 같았죠. 손을 잡아주고 따뜻하게 이야기해 주니까 김정은에게는 편안한 안내자였습니다. 하노이 회담이 깨진 뒤에는 김정은이 독자 노선을 가겠다고 했죠.
세 관계를 정리하자면, 김대중은 노련한 상대, 노무현은 부딪히는 파트너, 문재인은 따뜻한 안내자였습니다."
이재명 정부, 우리가 속도와 리듬을 만들 때
― 이재명 정부의 통일정책은 이전 정부와 어떻게 달라야 한다고 보십니까.
"첫째, 새로 시작해야 합니다. 다시 써야 합니다. 시대가 완전히 달라졌어요. 지금은 새로운 '적대적 공존'의 시기입니다.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부가 대화 중심의 한 흐름에 있었다면, 지금은 대결과 공존이 동시에 작동하는 구조예요. 그래서 이재명 대통령이 말한 '피스메이커에서 페이스메이커로' 전환은 아주 옳다고 봅니다.
이전까지 우리는 평화를 중재하는 피스메이커였지만, 이제는 흐름과 리듬을 만드는 페이스메이커가 돼야 합니다. 미국이 피스메이커 역할을 하고 우리는 속도와 방향을 조율해야 하죠. 그런데 아직 우리 사회는 그 역할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금강산 관광이나 개성공단 이야기를 반복하는 건 페이스메이커가 아니에요.
둘째, 시기를 잘 봐야 합니다. 북한은 내년 노동당 9차 당대회까지 '웅대한 작전'을 완성하려 하고, 트럼프 2기 정부는 2028년 LA올림픽까지 장기 비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 사이 3년이 우리의 기회 창입니다. 서두르지 말고 차분하게 가야 합니다."
K-컬처 영향력, 외교와 평화의 자산으로 써야
"셋째, 앞으로의 동력은 문화와 브랜드 외교입니다. 지금 한국의 국가 브랜드 가치, K-컬처 영향력이 세계적입니다. 그 힘을 외교와 평화전략의 자산으로 써야 합니다. 내년 7월 부산에서 열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는 북한 금강산과 한국 반구대 암각화 같은 남북 유산을 함께 보존하는 논의를 제안할 수 있습니다. 직접 대화가 아니더라도 국제무대에서 협력의 장을 만들 수 있죠.
또 2027년 세계청년대회(WYD)가 한국에서 열립니다. 교황 방한 가능성도 있어요. 이재명 대통령이 교황 방북을 제안한 것도 그런 맥락입니다. 수십만 명이 한국을 찾는 그 무대에서 한반도 평화의 메시지를 확산할 수 있습니다. 이런 문화와 국제행사를 통해 직접 대화는 아니지만 실질적인 평화의 공간을 여는 것, 그게 이 시대 페이스메이커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인터뷰를 마치며 그는 말했다.
"통일은 정책이 아니라 사람의 일입니다."
그 한마디가 긴 대화의 결론이었다. 운동으로 시작해 행정으로 옮겨가며, 그는 '이념보다 신뢰, 제도보다 관계'가 더 오래 남는다는 사실을 체득했다. 민화협의 배 위에서, 개성의 회의장에서, 청와대의 회의실 안에서 그는 늘 같은 고민을 반복했다. "남북이 함께 살아야 한다"는 말이 현실이 되려면, 누가 먼저 나서야 하는가. 그의 대답은 명확했다.
"이제는 우리가 속도와 리듬을 만들어야 할 때입니다."
김대중이 문을 열고, 노무현이 틀을 두껍게 만들고, 문재인이 길을 넓혔다면, 지금은 그 길 위에서 한국이 '페이스메이커'로서 흐름을 조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가 살아온 시간의 연장선이며, 여전히 남은 숙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