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한미정상회담 - 우려에서 안도로

  ‘피스 메이커’(peace maker)가 마법의 단어였다. 이 단어가 한미 정상회담에 대한 우려를 한순간에 날려버렸다. 정상회담을 하기 전에 미국이 정상회담을 취소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월 취임 이후 기존의 질서와 관행을 파괴해왔다. 전세계는 트럼프 대통령이 만들어가는 새로운 관행 때문에 혼란에 사로잡혔다. 트럼프 대통령이 던진 이슈는 무거웠고 그의 스타일은 예측불허였다. 이런 상황에서 취임 100일도 안된 이재명 대통령이 한미정상회담에 나섰으니 우려는 커질대로 커졌다. 게다가 한미정상회담을 코앞에 두고 트럼프 대통령이 SNS에 올린 메시지는 한국 국민들에게는 충격 그 자체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에서 숙청이나 혁명이 일어난 거 같다.”고 했다. 이어서 한국 정부가 교회를 압수수색하고, 미국 군사기지에서 정보를 수집했다고 말했다. 트럼프와 젤렌스키의 회담을 떠올리는 참모들도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긴장감이 넘치는 상황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피스 메이커가 되어달라”고 건낸 한마디가 상황을 순식간에 반전시켰다. 굳어 있던 트럼프 대통령의 얼굴이 펴지기 시작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한미정상회담 모두 발언에서 ‘피스 메이커’라는 단어를 세번이나 사용했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이 평화를 만드는 피스메이커(Peace Maker)가 되면, 저는 페이스메이커(Pace maker)가 되겠다”고 이재명 대통령이 말하자 트럼프 대통령은 마침내 웃음을 터뜨렸다.

  피스메이커는 트럼프 대통령이 소망하는 자신의 역할이다. 지난 1월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피스메이커가 되고 싶다는 말로 마무리를 장식했다. 그는 그동안 여러차례 전쟁을 반대한다는 발언도 했다. 이재명 대통령에게 피스 메이커가 되어달라는 말을 듣자 트럼프 대통령은 크게 고무된 것이다. 그는 이 자리에서 기자의 질문에  “저의 관심사는 전쟁을 중단시키는 것이다. 지난주에만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양측에서 7109명의 군인이 목숨을 잃었다. 저는 7개의 전쟁을 중단시켰다. 이런 일들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미 피스메이커가 되었다는 것이 그의 속마음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기가 인도-파키스탄 교전, 캄보디아-태국 분쟁 등 7개의 전쟁을 중단시켰다고 했지만 이에 대해 AP, Axios 등 미국 언론들은 부분적인 성과가 있기는 해도 과장이라고 지적했다.  7개의 전쟁이 모두 완전하게 중단된 상태는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이란 핵시설 폭격에서 보았듯이 그의 스타일은 충격적이었다. 그래서 논란도 많지만 그는 계속 자신이 전쟁을 반대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미 피스메이커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지난 5월 파키스탄과 이란의 전쟁을 중단시키는데 그가 역할을 하자 파키스탄은 트럼프를 피스메이커라고 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피스메이커 라고 치겨세운 발언은 피스메이커가 되고 싶은 트럼프의 꿈에 대한 또하나의 응원인셈이다. 

  정상회담 직전에 트럼프가 꺼낸 숙청, 혁명, 교회 압수수색, 미군기지 정보수집과 같은 발언은 정상회담에서 트럼프가 사용하기 위해 준비한 비수와 같은 협상수단이었다. 물론 백악관에 들어서는 이재명 대통령에게 귓속말로 그것은 가짜뉴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회담이 트럼프가 희망하는 방향으로 흐르지 않을 경우 이를 꺼내들고 협상판을 뒤흔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피스메이커라는 마법의 단어는 이 비수를 녹이고 또 김정은 위원장을 대화의 무대 위로 끌어올렸다. 피스메이커 발언 이후 두 정상이 나눈 대화는 모두 김정은 위원장과 북한에 대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말문 터진 듯이 김정은 위원장과 만났던 지난날을 회고하였다. 이재명 대통령이 재치 있는 대화로 북미대화를 한미정상회담의 의제로 전환시켜 버린 것이다. 평양에 있는 김정은 위원장이 뜻밖의 1승을 거두는 순간이었다.  

2.피스메이커를 희망하는 트럼프

  북한과 김정은 위원장에 대해 말을 하는 트럼프 대통령은 분명 신이 났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영리한 협상가였다. 이재명 대통령과 대화의 대부분을 북한에 대한 이야기로 채웠지만, 북한과 대화를 하기 위한 구체적인 제안은 단 한마디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김정은 위원장을 대화의 마당으로 불러들이기 위해 필요한 그 어떤 카드도 내비치지 않았다. 가령 두 정상의 대화가 무르익었을 무렵에 북한이 강력하게 반발하는 한미연합군사훈련이나 비핵화에 대해서 슬쩍 당근을 내비친다고 해서 전혀 어색하지 않은 분위기였다. 하지만 호기롭고 수다스러운  자기 자랑만 있었을 뿐이다. 김정은 위원장과 협상의 본무대가 만들어지기 전에 자신의 패를 내보이지 않으려는 협상의 달인다운 태도로 보였다.

  트럼프 대통령이 7개의 전쟁을 중단시켰다며 너스레를 떤 것은 은근히 자신이 피스메이커라는 것을 내세우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그의 노력에 따라서 임기가 끝나는 순간인 2029년 1월에 피스메이커라는 영예를 차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에게 이 영예를 안겨줄 가장 중요한 관문은 바로 북한이다. 역설적이게도 북한의 강력한 권위주의 체제나 핵개발 때문에 북한과 대화에서 성과를 거두는 것은 반대급부로  평화의 이미지를 안겨줄 수 있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미 3차례 김정은 위원장과 만나면서 그 파급력을 체험했다. 트럼프는 이 때 전세계 언론이 강렬하게 조명하는 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 위력을 감각적으로 알아차렸던 것이다. 이는 방송 진행자를 경험한 트럼프의 본능이다.

3. 평창에서 LA로

  트럼프 대통령은 평창동계올림픽에 대해 회고하면서 미국에서도 올림픽이 열린다고 흘렸다. 2028년에 열릴 LA 올림픽을 말하는 것이다. 평창올림픽을 회고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머리 속에는 LA 올림픽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이 김정은 위원장과 통화해서 북한을 평창 동계올림픽 참여로 이끌었다고 말했다. 물론 이 역시 과장이다. 피스메이커로서 자신의 이미지를 구축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평창올림픽을 평화올림픽으로 이끈 자신이 LA 올림픽을 평화올림픽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효과도 스며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8월 5일에 LA 올림픽 TF를 만드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미국은 과거 1996년 아틀란타 올림픽을 준비할 때도 올림픽 TF를 만들었다. 당시에는 책임자가 엘 고어 부통령이었다. 이번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의장을 맡았다. 부의장은 밴스 부통령이다. 

  이 TF의 목적은 LA 올림픽을 ‘안전하고, 순조로우며, 역사적으로 성공적인 행사’로 만드는 것이다. LA 올림픽을 역사적으로 성공적인 행사로 만들려는 트럼프 대통령의 머리속 한켠에는 평화올림픽으로 성공한 평창 동계올림픽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LA 올림픽이 끝나면 그해 늦가을엔 노벨평화상 시상식이 이어진다. 트럼프의 꿈은 거기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피스메이커를 향한 트럼프의 꿈은 이렇게 자신의 임기 마지막해까지 할 일을 계획하고 있을 정도로 현실적이다. 물론 구체적인 트럼프의 구상은 알려지지 않았다. 아마도 트럼프 머리속에 담겨 있고, 백악관 참모들의 수첩에 빼꼼히 적혀 있을 것이다. 

  미국 내부에는 복잡한 정치적 이해관계가 자리잡고 있다. 지난 여름 LA에 군대를 동원했던 트럼프가  LA 올림픽 태스크포스 의장을 맡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여론도  있다. 올림픽을 거부해야한다는 극단적인 의견도 표출되는 상황이다. 
트럼프로서는 뜻밖에 한미정상회담에서 피스메이커라는 말을 듣게 된 것이 반갑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피스 메이커를 말하자 트럼프 대통령의 얼굴이 펴지다가 마침해 활착 웃게된 것에는 이런 배경이 자리잡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트럼프에게 피스메이커가 되라고 권하고 자신이 페이스 메이커가 되겠다고 말한 것은 남북관계의 현주소 때문이다. 남북관계에서 한국의 주도적 역할은 역대 한국정부가 추구해온 원칙이었다. 미국 정부가 이를 뒷받침한 것은 김대중 대통령 시절부터였다. 1998년 6월 9일 미국 워싱턴DC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인 오벌오피스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만났다. 이재명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한 바로 그 자리였다. 이때 클린턴 대통령은 남북관계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운전대를 잡고, 나는 조수석으로 옮겨 보조적 역할을 하겠습니다.”고 말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햇볕정책을 내세우면서 대통령으로 당선된 직후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클린턴 대통령의 지지가 햇볕정책이 임기 첫해부터 힘을 받은 결정적 계기가 됐다고 회고했다. 

  햇볕정책과 운전자론은 노무현, 문재인 정부로 이어졌다. 문재인 정부 시절에는 운전자론을 더욱 강조해서 북한과 미국이 대화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되었고, 이후 코로나까지 발생하였다. 북한은 대화의 문을 닫고 자력갱생과 정면돌파를 내세웠다. 2021년에 열린 노동당 8차 당대회에서는 5개년 계획을 세웠는데, 국방과 경제 두 부문이 핵심이다. 이 5개년 계획 기간인 2023년에 북한은 남북관계를 ‘교전중인 두개의 적대국가관계’로 규정했다.  이 노선에 따라 북한은 남북대화를 완전히 단절시켰다.

  또 광복절을 앞둔 지난 8월 14일에는 “세상에서 제일 적대적인 국가에 대한 우리의 인식변화를 기대하거나 점치는 것은 사막에서 꽃이 피기를 바라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는 험담을 쏟아내었다.  남한이 ‘세상에서 제일 적대적인 국가’라는 것이다. 굳이 이렇게까지 표현할 필요가 있을까 의문이 들 정도로 김여정의 발언은 냉혹하기 그지 없다.. 

   2025년 6월에 취임한 이재명 대통령에 대해서도 김여정은  “역사의 흐름을 바꿔놓을 위인이 아니다”며 혹독한 평가를 하였다.  이 때가 한미정상회담을 눈앞에 둔 2025년 8월 20일이었다.

  하지만 미국에 대한 대한 김여정의 발언은 한국에 대한 비난발언과 비교하면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가 있다. 지난 7월 28일에 김여정은 한국과 미국을 비판하는 각기 다른 두 개의 담화를을 발표했다. 한국에 대해서는 “마주앉을 일도, 논의할 문제도 없다”고 쇄기를 박았다. 반면 미국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논지를 전개하면서도 “우리 국가수반과 현 미국 대통령 사이의 개인적 관계가 나쁘지 않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며 대화의 여지를 남겨두었다. 더구나 두 담화 모두 7월 28일에 작성한 것인데도, 발표 날짜는  분리하는 기술을 부렸다. 미국을 향한 담화만 하루 늦게 공개하여, 미국에 대한 유화 메시지를 담은 담화의 뉘앙스가 한국에 대한 비판 논조에 묻히지 않게 하려는 의도이다.

4. 페이스 메이커의 내일

  트럼프의 속내는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피스메이커로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어 나가면서 2028년 LA올림픽을 평창 동계올림픽 처럼 평화올림픽으로 개최해서 궁극적으로 노벨평화상을 받고자 하는 것이다. 김여정의 담화와 연결시켜 본다면 분명 북미 대화는 재개될 가능성이 있다. 아니 트럼프는 북미대화를 위한 큰바퀴를 굴리겠다는 의지가 분명해보인다. 하지만 남북대화 앞에는 깜깜하고 차가운 어둠이 펼쳐져 있을 뿐이다. 이같은 구조가 운전자였던 대한민국의 지위를 페이스메이커로 바꾸었다. 이재명 대통령이 실용주의자이기 때문에 현실을 간파해서 페이스메이커로 급변침한 것이다. 

  페이스메이커라면 지난 탈냉전 30여년 동안 운전자 역할을 하기 위해 세우고 추진해온 목표와 전략도 바꾸어야 한다. 북한은 우리가 햇볕을 쬐어서 낡은 외투를 벗겨야할 대상도 아니고 그럴 필요도 없다. 북한은 김대중 대통령이 1998년에 클린턴 미국 대통령에게 말했던 두터운 외투를 걸친 겨울나그네가 아니다. 북한의 지위를 변화시킨 것은 핵능력 뿐이 아니다. 김여정이 핵능력과 함께 계속 강조하고 있는 것이 ‘급변하는 지역 및 국제지정학적 상황변화’이다. 김여정은 북한과 러시아의 밀착, 미국과 러시아의 소통이라는 국제 질서의 변화가 북한에게 새로운 지위를 부여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오는 9월 3일 중국 전승절 행사에 김정은 위원장이 참석한다.  김정은ㅡ시진핑ㅡ푸틴이 처음으로 만나는 진귀한 장면이 펼쳐진다. 김여정이 말한 국제 지정학의 변화는 이런 걸 뜻하고 있다. 김여정이 우리를 거들떠보기는 커녕 야멸차게 관계를 끊어버린 것은  “(남한이)긴장완화노력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정세격화의 책임을 우리(북한)에게 떠넘기고 세간의 지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어리석은 타산을 하고 있는 것이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한반도의 판이 다시 짜여지기 전에는 긴장완화를 위한 몇가지 남북대화에 임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북한에게 손을 내밀면 내밀수록 북한의 대남비난은 더 격화될 것이다. 

  그래서 페이스메이커의 역할이 필요하다. 북미대화를 지원하면서 페이스메이커가 할 일을 다시 정립해야 한다. 오는 10월 10일 노동당 창건 80돌 행사와  연말연초로 예상하는 노동당 9차 당대회에서 북한은 새로운 정책을 표방할 것이다. 9차 당대회 이후에 북미 접촉은 본격적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크다. 장기적인 한반도 전략을 세우고, 다가오는 북미접촉의 시기를 대비하며, 눈밭 내딛는 심정으로 한걸음 한걸음 내디뎌야할 시기다.   

  이재명 대통령 임기 5년과 겹치는 트럼프 대통령 임기 4년은 한반도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좋은 기회이다.  김대중 대통령 임기와 빌 클린턴 대통령 임기가 겹쳤던 2년을 제외하고는 한미 양국 대통령들의 정책기조는 극단적으로 대립했다. 이재명-트럼프 두 대통령의 임기가 겹치는 4년은 김대중-클린턴 임기가 겹쳤던 2년과 한미 정상의 케미가 맞는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이 4년 동안은 페이스 메이커론을 가지고 운전자론이 추구했던 것과 같은 ‘한반도의 강고한 평화’를 정착시킬 수 있는, 앞으로 쉽게오기 어려운 절호의 시기가 될 것이다. 

이 글은 시사인에 실린 기고문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