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수 이사가 광복 80주년을 맞이하여 만주를 다녀온 기행문을 보내왔습니다경향신문사 후마니타스 연구소 주최로 8월 5일부터 8월 10일까지 진행한 일정입니다대련-뤼순-심양-하얼빈으로 이어지는 여정은 19세기말부터 20세기까지 이어지는 시기에 강대국들의 욕망이 꿈틀거리고 충돌하는 공간이었습니다.

 


1. 대련 이토송장으로 돌아오다!
 
  1909년 10월 이토는 대련에 도착했다중산광장에 새로 지은 최고급호텔인 야마토 호텔에 묵었다이 호텔이 지금 대련 호텔인데 마침 개축 중이었다대련호텔을 비롯하여 중산광장 주변은 근대식 건물들로 둘러쌓여 있었다온갖 근대식 건물들이 차지하고 있는 서울시청 주변이 떠올랐다일제는 이렇게 방사형 광장 주변에 권력기관들을 배치해서 공간을 장악하려고 했다 한다.
 
  한여름인지라 나뭇잎들은 한창 초록초록했다보슬보슬 내리는 비 때문에 발길이 자꾸만 급해진다그날 야마토 호텔에 묵고 있던 이토는 한껏 부풀어올라 마음마저 바빠졌을지도 모르겠다기차타고 대련에서 하얼빈까지 만주벌판을 종단하는 것을 눈앞에 두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토의 행선지는 하얼빈이었다대륙 지배의 욕망을 키우기 위해서다대련에서 하얼빈에 이르는 남만주철도를 생각하며 아마도 런던 유학시절 보았던 영국의 증기기관차를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그의 스승인 요시다 쇼인은 미국의 페리제독이 타고 온 증기선인 검은 흑선을 보고 두려움과 경외감 때문에 잠들지 못했다이제 그 스승이 품은 야심대로 철마를 타고 대륙을 내달리게 되었으니 일본이 아시아의 대영제국이 되는 날이 머지 않았다 생각하며 심장이 뛰었을 것이다요시다 쇼인이 씨앗을 뿌린 독이든 과일인 대동아공영권을 이토는 이렇게 가꾸었던 것이다그래봐야 다 부질없는 짓인데도 말이다.
 
  비는 그치지 않았고 걸음은 더 바빠졌다다음 장소는 중산광장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대련병원이었다대련병원으로 이동하면서 이토가 그렇게 부풀어 올랐을 때 북만주에서 냉철하게 그를 기다리고 있을 안중근을 떠올렸다며칠 후 하얼빈에 도착한 이토는 안중근에게 총알 세 발을 받았다하얼빈에서 대련으로 오는 남만주철도를 달리는 기차에는 심장이 멎은 이토의 시신이 실려 있었다이토는 이렇게 천벌을 받은 것이다.

  중산광장에 있는 근대식 건물에는 일본의 '침점'이라는 글귀가 새겨 있었다침략해서 점령했다는 것이니강점보다도 더 불법성과 야만성을 담은 표현이었다총칼로 다른 나라를 짓밟았으니총맞은 것은 사필귀정이다.
 
  대련병원에 이르니 비는 더욱 거세졌다건물 입구를 장식한 정원은 수풀로 우거져 있었다멀리 중산광장을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뻗은 도로들이 건물사이로 얼핏 보였다뷰가 좋다는 안내판이 걸려 있는 이유겠다평소 뷰 좋아하는데순간 내 귀에 저 수풀 속에 있는 흉상이 노만 베순이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카나다의 슈바이처라고 알았던또 내가 아는 다른 방식으로 인도주의를 실천한 2인 가운데 한명인 노만 베순이 여기 있다니 그야말로 깜놀이었다다른 1인은 체 게바라이다.
 
  그 사이 몸은 서서히 비에 젖어들었다바빠진 발길을 호텔로 돌리면서도 노만벤순과 대련대학이 어떤 관련이 있을까 하는 의문은 사그라지질 않았다.
 
  숙소에 돌아와서 병이 도졌다검색에 몰두하다가 또 깜놀했다대련병원은 대륙침점을 위한 종합기업군인 남만주철도주식회사가 운영하는 만철병원의 후신이었던 것이다노만 베순은 중일전쟁에 참전해서 죽어가는 중국군을 치료했다그런 사연이겠거니 했다.
 
  근데 하얼빈에서 송장이 된 이토의 시신을 검안한 곳이 바로 만철병원이었다야마토 호텔을 내러다보는 언덕에 있는 바로 그 만철병원에서 사망진단서도 발급했다우리가 비맞으며 갔던 바로 그 병원이다그의 망령이 아직도 이곳저곳 떠돌고 있는 현실은 소대가리에 말엉덩이 같은 망측한 꼴이나 다름없다.
 
  야마토 호텔에서 키운 망상에 대해 시신이 되어서라도 헛되도다헛되도다를 깨우치게 하려는 신의 뜻이 이렇게 대련병원에 담겨 있는 것이다그의 시신이 안치되었던 곳인지는 몰랐지만 마음은 비에 축축해졌었다이 역시 망측한 꼴을 탄생시킨 죽음도 죽음인지라그의 시신이 잠시 머물렀던 그 현장에 우리 일행들을 내보낸 신의 숨은 뜻이려니 한다.
 
2. 뤼순 ㅡ 안중근 유해해법
 
  일제는 안의사 사형조차 비밀리에 집행했다두렵긴 한참 두려웠나보다사형 도구들을 보니 숙연해졌다역사속에서 가끔씩 접했던 교수대였다무거운 마음을 이끌고 뤼순감옥 사형장 밖으로 나섰다.
 
  중국은 뤼순감옥 내부에 국제기념관을 만들고안중근신채호이회영 등 뤼순에서 쓰러져간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지사들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었다그런데 뜻밖이었다그 곳에 들어가니 또 다른 사형장이 있었다여기가 안의사의 사형이 집행되었던 장소라는 한국어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순간 혼란스러웠다아까 그 사형장은 뭐고또 이 곳은 뭐란 말인가?
 
  꼬리를 무는 의문을 담고 기념관 안으로 계속 들어갔다안의사 흉상을 모신 방에서 우리 일행들은 간단한 추모행사를 했다사형장 때문에 머리가 잠시 어지러웠지만가슴은 울먹거리기 시작했다묵념 하는 도중에 두 눈이 뜨거워졌다훌쩍거리는 일행도 있었다안의사의 유해도 찾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부끄러웠고안의사 흉상 앞에서 한없이 죄스러웠다.
 
  뤼순 감옥 근처에 이를 때 주변부터 살폈다사방팔방에 아파트가 세워지고 도로가 보였다어느 한 방향으로 쭉 나가면 개발되지 않은 지대가 있다는 말도 들었으나 눈에 곧바로 띄지는 않았다.
 
  독립이 되면 유해를 조국강산에 묻어달라는 것이 안의사의 유언이었다일제는 그의 장지를 숨겼고우리는 광복 80년을 앞두고 있는 지금까지도 안의사의 유해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이 지역을 더 개발하기 전에 유해를 찾기 위한 마지막 노력을 기울여야한다중국당국은 북한과 공동으로 조사를 해야만 허용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북한과 손잡고 당장이라도 조사를 시작해야한다못찾으면 어느 시점에서는 유해를 찾을 수 없다는 최종결론이라도 내려야할 것이다그렇다면 안의사의 고향인 황해도 해주와 신천에 남북 공동으로 안의사 기념관을 세우고백범이 만든 안의사 가묘가 있는 서울과 교류를 해야한다그렇게 안의사의 뜻을 기려야한다안의사도 유해 못찾은 못난 후손들을 이해해줄 것이다.
 
  뤼순 감옥을 나오면서 사형장에 대한 의문을 풀어야한다는 강박관념이 떠나질 않았다조사를 해보니 일제는 사형장 옆에 있는 폐쇄된 반지하방에서 몰래 형을 집행했다고 한다중국정부가 이를 복원했는데 한글표지판이 있었던 바로 그 곳인 것이다.
 
  사형장 옆에 시체를 내보내는 북쪽으로 난 쪽문이 있다이 문으로 안의사 유해를 내보냈으니 북쪽 공동묘지에 안의사 유해가 묻혀 있을 것이라는 추정도 있었다하지만 안의사 사형이 집행된 곳은 이 사형장이 아니다그렇다면 그 가설은 근거가 미약해진다.
 
  대련과는 달리 뤼순에서는 햇볕이 쨍했다오전에 뤼순 일대에 있는 격동의 현장을 둘러보았다관동군 사령부 청사에도 갔다. ‘뻑큐를 날리는 동작을 취했다가 그냥 손가락질하는 동작으로 바꾸었다찍사 선생께서는 그 순간들을 놓치지 않았다그리하여 태어나서 첨으로 뻑큐를 날린 나의 모습을 사진기록에 남길 수 있게 되었다. ‘뻑큐를 안날렸으면 후회할 뻔했다.
 
  뤼순 법원으로 가는 길은 뜨거웠다만주의 여름도 만만치 않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인지뤼순은 만주가 아니다는 것을 강변하는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하여튼 더웠다방학이지만 뤼순 법원은 한가했다건물에 들어서자마자 수번을 달고 단지를 보이고 있는 유명한 안의사 사진이 큼지막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한국어를 또박또박 구사하는 안내원이 안의사가 재판을 받았던 법정을 소개해주었다.
 
  우리는 모두 안의사가 재판을 받았던 그 자리에 앉아서 사진을 찍었다용감하게 제일 먼저 나섰지만정작 그 자리에 앉으니 어떤 마음가짐어떤 자세를 취해야할지 막막했다순간 당당하게 라고 내뱉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법정에서 틀어준 동영상에서는 안의사의 동양평화론도 소개했다우리 일행에게 전문적인 지식을 제공해주는 탁월한 근현대사 연구자인 신주백 선생님이 이미 동양평화론과 이토의 노선이 어떤 점에서 결정적으로 다른지를 설명한 터였다그래서인지 동영상이 그렇게 깊이가 있지는 않았다그래도 안의사의 동양평화론이 유럽연합이나 유엔과 비슷한 발상으로 이보다 반세기를 앞선 사상이라고 설명해주는 것만으로도 이 동영상 제작자에게 감사드릴 일이다.
 
3. 남만주 철도 ㅡ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엇갈리다!
 
  1909.10, 이토는 대련에서 남만주철도에 올랐다대련을 벗어나자 낮은 구릉들이 눈에 들어왔다증기기관차 칙칙폭폭 소리에 익숙해질 무렵 창밖을 보니 구릉들은 보이지 않았다멀리 지평선이 눈에 들어왔다저 지평선이 바로 러일전쟁에서 흘린 피의 댓가라 다지며 이토는 침략의 야심을 더 뜨겁게 달궜다.
 
  2025.8. 고속철을 타고 대련 시가지를 벗어나자 눈에 익은듯한 야트막한 구릉들이 펼쳐졌다친숙한 풍경이니 편안했다. 30분쯤 더 달리자 넓은 벌이 나타나기 시작했다이른바 조상들이 말타고 개장수 했다던 바로 그 만주벌판이다가난하지도 주저하지도 않겠다며 외칠 때 떠올린 바로 그 광활한 만주벌판이 눈앞에 열린 것이다.
 
  들판에는 군데군데 포플러가 자리잡고 있었다모네의 포플러 가로수를 닮은 풍경도 휙 하고 지나갔다곳곳에 옥수수밭이 바둑판처럼 정비되어 있었고드문드문 논도 눈에 들어왔다송화강 언저리부터 압록강 사이는 고구려가 터를 잡았던 곳이다그곳에 벼농사를 보급한 것도 19세기 후반 조선 사람들이었다.
 
  기차가 옥수수밭 사이로 들판을 달릴 때 하얼빈에서 압송되어 오는 안의사를 떠올렸다정상적이라면 안의사는 하얼빈에서 재판받고 최종심인 2심은 나가사키 재판소에서 받아야했다그러나 안중근은 일본이 식민지나 다름없이 차지하고 있는 뤼순으로 압송당했다남만주철도를 타고 뤼순으로 향하는 길에 안의사의 눈에도 만주벌판과 지평선이 한눈에 들어왔을 것이다안의사는 저 너른 들판이 일본의 침략의 무대가 되어는 안된다는 상념에 사로잡혔다동양평화는 주권존중과 침략반대협력과 연대로 가능하다는 생각이 더욱 뚜렷해졌다.
 
  이토가 영국에 유학할 무렵 유럽에서는 인상주의 화풍이 유행하기 시작했다인상파의 등장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영국의 화가 윌리엄 터너이다터너는 '증기 그리고 속도 대서부철도'라는 작품에서 천지를 뒤흔드는 철도의 마력을 표현했다당시 철도는 시대변화의 상징이고 부의 원천이었다그 소리만큼 세상을 격동시켰다.
 
  서양물을 먹은 이토에게 철도는 문명과 개화를 약속하는 단어였다이토의 눈에는 남만주철도 차창밖으로 황량한 벌판과 한적한 마을이 펼쳐졌다이토는 문명이 없는 야만의 모습이라고 생각을 것이고이 미개한 지역은 자신이 통치해야할 공간이었다그것은 다른 말로 그의 스승인 요시다 쇼인이 설계한 황당한 제국을 이룩할 땅덩어리였다.
 
  그가 가는 목적지인 하얼빈에서 이 같은 침략적 세계관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바로 안중근의 권총이었다. 2025.8 고속철은 시속 300키로가 넘는 속도로 부드럽게 미끄러졌다이토에게 남만주철도는 탐욕과 침략을 업고 뻗어나는 마수였다안의사에게 이 노선은 동양을 숨쉬게하는 동맥이었다아직 동양평화는 미완이다뜨거운 남도에서 압록 두만 건너 광활한 만주벌판까지 거미줄처럼 얽히는 철도그것이 안의사가 꿈꾸었던 동양평화의 한 모습일 것이다. (이때 일본까지 해저터널은 어찌할 것인지는 더 공부를 해서 내공이 깊어질 때까지 판단을 미뤄야겠다안의사는 한중일 협력을 꿈꾸었지만..)
 
4. 심양 이글거리는 이토의 욕망
 
  하얼빈으로 죽음의 길을 향하고 있던 이토의 발길은 만주 최대의 도시 심양에도 어김없이 자취를 남겼다이토가 심양 야마토 호텔에 묵었다는 신주백 선생님의 설명을 듣는 순간 찌르르 전율이 흘렀다야마토 호텔그 안에서는 침략과 음모와 욕망과 사치와 허영과 위선이 이글거렸을 것이다근대의 물을 먹었다는 자들이 추구했을 대일본제국의 본질은 이렇게 만들어지고 있었을 것이다.
 
  일본은 이미 대련과 뤼순을 차지하고 관동주라 이름붙였다관동도독부를 설치하고관동군을 주둔시켰다만주판 동인도 회사라고 할 수 있는 남만주철도 주식회사(만철)도 세웠다이후 일본은 당연히 만주로 촉수를 뻗쳤다이토는 만주에 침을 바르기 위해 하얼빈으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심양에도 중산광장이 있고대련과 마찬가지로 방사형으로 도로가 뻗어 있다주변에는 근대식 건물들이 늘어섰는데그 때부터 이 건물들이 근대적 분위기를 자아내서 오늘에 이르고 있을 것이다.
 
  달라진 것이라면 그 광장 이름이 야마토광장에서 중산광장으로 바뀌었다는 것과 광장 한가운데 마오 동상이 떡하니 버티고 서있다는 것이다저 동상이 중산이냐고 묻는 사람이 없을 것처럼 왜 중산광장에 마오동상이 서있냐고 묻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중산과 마오는 중국인들에게는 어차피 구별할 필요가 없이 좋아하는 인물들일테니까...
 
  대련에서 이미 중산광장을 둘러보았기 때문에 바쁜 일정에 굳이 심양 중산광장까지 내려서 둘러볼만한 형편은 아니었다차로 한바퀴 둘러보다 야마토호텔에 대한 신주백 산생님의 설명을 들었던 것이다우리 여행을 근현대사 학습여행으로 만들어주신 신주백 선생님은 이토가 푸순 탄광에도 들렸다고 덧붙였다당시 푸순탄광은 아시아에서 제일 큰 로천탄광이었다이 탄광은 너무나 뻔하게도 만철이 소유했다그 탐욕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안도현은 "매미가 울어서 여름이 뜨거운 것이다"고 읊었다사랑을 위해서 매미는 이렇게 뜨겁게 운다는 것이다매미 울음소리는 안들리는데 심양의 여름은 뜨거웠다안중근이 하얼빈에서 뤼순으로 압승될 때는 북만주 벌판에 찬서리가 내릴 무렵이다.
 
  심양고궁을 빼놓을 수 없었는데거기를 둘러보며 별의 별 생각을 다했다이토 히로부미와 청태종 홍타이치가 조선을 침략한 공통점이 있다면소현세자와 안중근 의사는 신문물을 수용하여 나라를 발전시키겠다는 포부를 가졌다는 점에서 닮은 점이 있다.
 
  일행 중 한 분은 소현세자 부인과 나혜석을 떠?리며 심양고궁을 거닐었다고 했다그들은 시대를 잘못 만나 팔자 험악해진 조선의 세자비와 식민지 시대의 선각자였다그들의 불행과 수난은 여성이었기에 몇 배 더 심했으니 오늘날 그녀들을 기억해주는 것은 우리들의 마땅한 역할이겠다.
 
  나라가 힘이 없어서임금이 무능해서 심양에 끌려갈 수밖에 없었던 조선 여성들을 환향녀라 손가락질 했던 적도 있다이런 부끄러운 역사를 떠올리며 심양고궁을 거니는 것은 이곳을 관람하는 괜찮은 방법이다혹시나 더위에 인산인해까지 더해진다면 이 방법은 꽤나 괜찮은 관람법이 된다.
 
  심양고궁은 투박하니 웅장하지 않고 웅장하지 않지만 억센 기운이 스며들어 있는듯했다경복궁에 비해서도 아직은 비례나 균형같은 세련미는 갖추지 못한 졸부의 감각과 닮았다고도 할 수 있겠다주례에 따라서 엄격하게 유교적 질서에 따라서 경복궁을 세?던 조선의 유학자들에게 오랑캐의 궁궐은 졸부의 돈자랑에 불과한 것이었을 게다이렇게 오랑캐라고 조선의 양반들이 무시하고 있을 때 청이 세워졌고 중국 역사에서 광활한 영토를 개척한 나라가 되었다우리는 그 나라에게 갖은 모멸을 다 당해야했다.
 
  홍타이지는 심양시절에는 확실히 졸부였나보다그의 집무실 뒤켠으로는 침실과 후궁들에게 한 채씩 나눠준 집들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었다그 집 한 채에서 기거하던 장비라는 후궁이 있었으니 그가 총명하기 이를데 없어서 그의 손자까지 권력을 잡게했다그가 중국을 세계 최강의 반열에 올려놓은 강희제였다.
 
  역사는 이렇게 반전을 거듭하면서 발전하는구나인파에 밀리면서도 그런저런 생각이 맴도는 사이에 따가운 햇살이 가슴속까지 파고들었다나혜석이 '만주의 여름'에서 묘사했던 그 햇살이겠거니 했고안중근이 압송될 때는 11월이었으니 그나마 다행이겠거니 했다.
 
하얼빈바람이 불어오는 그곳으로 가다!
 
  만주답사는 하얼빈역에 있는 안중근 기념관 방문에서 절정에 이르렀다거기서 이토를 저격하는 안중근의 자세를 흉내내어 보았다이번 만주 답사에서 찍은 사진 가운데 한 장을 꼽으라면 당연 이 사진을 꼽겠다.
 
  하얼빈 역사에서 동양평화를 향한 독립전쟁의 총소리가 울렸고 안중근의 의거는 온 세상에 알려졌다손문은 공은 삼한을 덮고 이름은 만국에 떨치나니라고 안의사를 추모했다.
 
  신주백 선생님은 동양평화와 독립전쟁이 안의사의 의거를 설명할 수 있는 두 개의 키워드라고 강조했다안의사의 의거 이후 국수주의와 이기주의로 흐르는 것을 막는 장치가 독립운동사에 흐르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일행 가운데 가장 검은색 머리카락을 가진 분은 독립운동사를 공부하는 것이 국뽕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다며 기뻐했다.
 
  하얼빈역에 있는 안중근 기념관은 안의사가 이토를 저격했던 현장으로 향햐는 두 개의 통로로 이뤄졌다열차 플랫폼에 있는 현장과 두 개의 통로 사이에는 격자무늬로 이뤄진 커다란 창틀이 가로막고 있었다그 격자 창틀 때문에 현장을 제대로 보기가 어려웠다아쉬움이 지금도 남아 있다이왕이면 큰 통유리를 놓았으면 좋았을 것이다.
 
  중국은 연합군포로수용소나 731부대 현장을 복원시켜서 일본의 야만성과 자신의 피해자성을 부각시키는 방식으로 과거를 기억하고 있다반면 자신들은 일본인 포로를 교화시켰다고 내세우고 있다이런 단순대비는 권선징악이라는 전통적인 기법이겠다그런데 안중근 기념관에 통유리를 놓는다면 중국의 과거 기억법은 권선징악을 초월하게 될 것이라고 기꺼이 훈수를 두고 싶다.
 
  안의사가 거사를 도모하면서 결의를 다졌던 조린공원안의사는 자산의 유해를 그곳에 묻었다가 해방된 조국에 안기기를 바랬다그 조린공언에는 '청초당'이라는 안의사의 글씨가 새겨진 비석이 있다.
 
  우리의 안중근 루트 답사는 여기까지였다이곳이 마지막이었지만 끝이 아니었다안의사의 마지막 글씨였던 청초당에 담긴 뜻나는 '파릇파릇한 세상'으로 해석하고 동양평화로 읽는다청초당 비석 앞에서 그 파릇파릇한 평화의 세상을 향해 다시 발걸음을 시작했으니마지막 장소였지만 그것이 끝이 아닌 이유다.
 
  조린공원의 바람은 시원했다김광석이 부른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흥얼거리며 조린공원을 거닐었다이제부터 나에게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란 바로 하얼빈이다내 피부에 와닿는 상쾌한 바람은 파릇파릇한 세상청초당에서 불어오는 것이다시원한 바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