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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넘어 길을 만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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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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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외교연구센터 / 남북관계와 한반도평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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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기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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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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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칼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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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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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기의 시절 ‘평화통일 방안’을 들고 임진강을 건넌 김낙중, 그리고 문익환, 임수경, 정주영
방북. 지금이야 흔한 일이다. 대북사업을 위해, 민간행사를 위해, 혹은 인도적 지원을 위해 민간인들의 방북 기회가 적지 않다. 그만큼 남북 인적 교류가 활성화됐다. 금강산 관광객을 제외하고 2007년 한 해 남북을 오간 사람들은 15만9천 명이다. 1989년 남북 인적 교류가 공식화된 이후 2007년 말까지 오고 간 사람은 43만4천 명이다.
▷북한에서 감옥생활, 남한에서 징역형
냉전 시대는 달랐다. 북녘 땅은 지상에서 갈 수 없는 곳이었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이 38선에도 가슴속에도 머릿속에도 그어져 있었다. 선을 넘은 사람들이 길을 만들었다.
많은 사람들은 1989년을 기억한다. 문익환과 임수경의 방북 때문이다. 그러나 그보다 앞선 사람이 있다. 1956년 6월23일 경의선 철로를 따라 한 청년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걸어왔다. 청년 김낙중이다. 그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혹시나 경비병들이 총으로 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보초를 서던 미국 병사는 처음 보는 희한한 광경에 어리둥절했다. 신사복을 입은 청년이 노래를 부르며 한가롭게 철길을 따라 걸어오고 있는 풍경은 초현실적이었다. 엉겁결에 “손들어” 했고, 그 청년은 영어로 “나는 서울 시민이오. 평양에 다녀오는 길인데 서울로 안내해줄 수 있겠소” 그렇게 말했다.
어찌된 일인가? 1년 전 6월 억수로 비가 오는 날, 청년은 고무튜브에 의지해서 임진강을 건넜다. 허리춤에는 비닐주머니를 찼는데, 그 안에는 그의 방북 목적이 담겨 있었다. 바로 ‘통일독립청년 고려공동체 수립안’이라는 평화통일 방안이었다. 그는 누구인가? 전쟁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1954년 부산 광복동의 거리에서 요즘 말로 1인시위를 했던 청년이었다. 흰옷을 입고, 머리를 삭발하고, 등불을 들고 그는 외쳤다. “전선에서 쓰러져가는 가난한 이 땅의 아들들을 위해 전쟁을 반대하며 눈물을 흘려줄 사람은 없는가?” 그의 등불에는 ‘탐루’(探漏), 즉 눈물을 찾는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혼자 힘으로 평화통일 방안을 만들어 정부를 설득했다. 이승만 대통령에게 청원서를 보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도 무모한 행동이었다. 어떤 시절이었던가? 단지 평화통일론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진보당의 조봉암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던 어두운 시대였고, 광기의 시절이었다.
청년은 미친 사람으로 취급을 받았고, 경찰서에 붙잡혀 가 얻어맞기도 했다. 김낙중은 남한 당국을 설득하는 데 한계를 느낀다. 그리고 북한 당국에 자신의 평화통일 방안을 설득해보자는 결심을 한다. 그것이 남한 당국을 설득하는 근거가 될 수 있겠다는 판단도 했다. 그래서 임진강을 건넜다. 목숨을 걸고. 어렵사리 도착한 북한은 이 청년을 어떻게 대했을까? 당연히 남한의 간첩으로 여겼고, 감옥에 가두었다. 두 달 동안의 감옥생활과 요양을 거쳐 1년 만에 다시 남쪽으로 돌아왔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역시 감옥이었다. 다행히 재판 과정에서 간첩 혐의는 벗었고,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의 징역형이 선고됐다. 그렇지만 그것도 상고를 통해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고, 그 혐의조차도 4·19가 일어난 직후 대법원에서 면소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고난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그는 이 사건 이후에도 1962년, 1973년, 1992년 그렇게 세 번 더 간첩 혐의로 감옥생활을 했다. 자신이 만든 평화통일 방안을 설득해보겠다는 순수한 용기에 대한 처벌치고는 너무 가혹했다. 너무 진지해서 시대보다 앞서나갔던 죄, 분단 시대는 그런 열정이 죄였다. 세월은 흘렀지만, 그는 아직도 청년으로 살고 있다. 통일 문제에 관한 세미나장에 가면 여전한 탐구심과 열정을 지닌,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청년 김낙중’을 만날 수 있다.
▷그들의 ‘잠꼬대 아닌 잠꼬대’
1989년 새해가 밝아올 때 문익환 목사는 시를 쓰고 있었다. ‘잠꼬대 아닌 잠꼬대’라는 제목의 시에서 그는 “난 올해 안으로 평양으로 갈 거야/ 기어코 가고야 말 거야 이건/ 잠꼬대가 아니라고 농담이 아니라고/ 이건 진담이라고…”라고 썼다. 그리고 정말 갔다. 도쿄와 베이징을 거쳐 3월25일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한 문 목사는 “나는 이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바랐던 윤동주의 마음, 모든 통일은 선이라고 외쳤던 장준하의 마음을 스스로의 마음으로 하면서 김일성 주석 동지를 만나고자 합니다”라고 말했다.
며칠 뒤 문익환 목사는 두 팔을 벌려 김일성 주석을 안았다. 통일 방안을 논의했고, 남과 북에서 통일의 장애를 없애기 위해 노력하자고 말했다. 4월2일에는 북한의 허담 당비서와 함께 9개항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노태우 정부가 1988년 7·7 선언을 발표하면서 남북 자유왕래를 선언했고, 정주영 회장의 북한 방문이 공표되던 시점이었다. 박철언을 비롯한 당국자가 밀사의 이름으로 남북을 오가던 시절, 누구는 밀사고 누구는 밀입북이냐는 반발이 터져나왔지만, 문익환 목사는 그 일로 다섯 번째 감옥살이를 했다.
그해 여름은 뜨거웠다. 전대협 대표 자격으로 임수경이 평양을 방문한 것이다. 6월21일 서울을 떠난 그는 도쿄, 서베를린, 동베를린을 거쳐 열흘 만인 6월30일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다. 임수경의 방북은 울림이 컸다. 통일운동사에 미친 영향은 말할 것도 없고, 북한 사회에 주는 충격도 적지 않았다. 한 해외동포 기자의 요청으로 부른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는 이후 남과 북이 만나는 장소에서 어김없이 불리게 됐다. 임수경이 입고 있던 청바지와 티셔츠도 북한 청소년 사이에 유행이 됐다.
더욱 중요한 것은 임수경의 판문점 통과다. 그는 평양 도착 성명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판문점을 통해 돌아가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7월27일 정전협정 기념일에 귀환하고자 하는 시도는 무산됐다. 유엔사는 한국 정부의 동의가 없는 상황에서 판문점 통과를 허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고, 북쪽 역시 그런 상황에서 신변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면서 말렸다. 임수경은 판문점 통과가 무산되자 단식에 돌입했다. 평양축전 참가자와 북쪽 학생을 포함해 100여 명이 동조 단식에 들어갔다. 단식이라는 시위 방식은 북한 사람들이 처음 보는 것이었다.
판문점에서는 매일 반미 시위가 벌어졌다. 그렇게 혼란한 틈을 타서 7월29일 오전 11시 군사정전위원회 중국 쪽 참모였던 쭤슈카이(左修凱) 소령과 그의 아내가 망명을 했다. 조용히 판문점 회의장의 분계선을 넘어왔고, 그의 소원대로 미국으로 갔다.
임수경이 판문점을 넘어온 날은 8월15일이다. 문규현 신부의 손을 잡고 금단의 선을 넘었다. 고작 높이 7cm, 너비 40cm의 시멘트 경계였지만, 그것은 분단을 가로지르는 역사적 넘나들기였다. 그날 임수경은 판문점에 울리던 매미 울음소리를 기억하고 있다.
당시 유엔사에 근무하면서 현장에 있었던 이문항씨는 북한 쪽 군사정전위원회 장교와의 비공식 대화를 2001년 펴낸 〈JSA-판문점〉이란 책에서 이렇게 소개했다. 판문점을 통과하려면 정전협정상 군사정전위원회 쌍방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사실을 북쪽이 잘 알면서 왜 통과시켰느냐고 묻자, 북쪽 장교는 베이징을 경유해 돌아갈 것을 간곡히 부탁했지만 ‘차라리 판문점에서 죽겠다’고 하는데 말릴 수가 없었다고 털어놨단다.
▷잊지 못할 ‘금의환향’ 퍼포먼스
1998년 6월16일 판문점에서는 감동의 행위예술이 펼쳐지고 있었다.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이 소떼를 몰고 판문점의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건넜다. 64년 전, 나이 열여덟에 아버지의 소 판 돈 70원을 갖고 그는 남으로 내려왔다. 성공한 기업인이 된 정주영 회장은 세계가 주목한 그날의 잊지 못할 퍼포먼스의 의미를 “한 마리의 소가 1천 마리의 소가 돼 그 일을 갚으러 고향 산천을 찾아간다”고 말했다.
길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소떼 방북이 있은 지 2년 뒤에 정상회담이 이뤄졌다. 그리고 비무장지대의 지뢰는 제거되고, 철조망이 걷히고, 도로가 났다. 2007년부터는 도로 옆으로 기차가 다닌다. 루쉰의 말처럼 처음부터 길은 없었다. 사람들이 걸어가면 그것이 길이 되는 것이다. 정부만 길을 만든 것은 아니다. 민간의 역할 또한 무시할 수 없다. 특히 정부 당국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뜸할수록 민간 교류의 역할이 중요하다. 오고 가야, 평화의 길도 통일의 길도 만들어지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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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21.hani.co.kr/section-021170000/2008/06/021170000200806120714019.htm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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