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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북미정상회담, 왜 다다익선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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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진흥코리아연구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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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외교연구센터 / 남북관계와 한반도평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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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안진단 310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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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보고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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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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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대칭 정상회담의 역풍
2. 3차 북미정상회담, 왜 필요한가.
3. 비건의 방한
4.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
5. 국민이 답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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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대칭 정상회담의 역풍
모든 관계가 그렇듯이 서로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기 위해서는 대칭적이어야 한다. 신사적으로 표현해서 ‘상호 호혜적’이어야 하는 것이다. 세기적인 변화를 이끌 정상회담이라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 가장 모범적인 사례가 레이건 미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공산당 서기장의 정상회담이었다. 레이건-고르바초프 정상회담이 성사된 것도 극적이었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1979.12)으로 미·소 신냉전이 격화되고, ‘냉전의 전사’를 자임한 레이건 행정부가 등장해 핵 군비경쟁을 가열시켜 극도로 핵전쟁 위험을 고조시킨 가운데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 3차 북미정상회담, 왜 필요한가.
레이건과 고르바초프의 정상회담은 회담 이전의 적대적이고 편견에 사로잡혔던 서로의 관계가 정상적인 개인적 유대 증진으로 진전을 이루면서 결실을 맺었다. 이와 유사하게 트럼프와 김정은의 정상회담도 개인적 유대관계가 그 자산목록의 첫 순위를 차지한다. 이를 폄하할 필요는 없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라도 일단 서로의 모습을 정확히 바라볼 수 있다면, 새로운 신사협정의 필요성도 떠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트럼프-김정은 정상회담은 지속될 가치가 있다.
○ 비건의 방한
비건의 방한 결산에 대해, 비건이 남북협력에 대한 미국 정부의 강력한 지지 입장을 표명했다는 보도 내용과 미국 정부도 대북 대화 재개에 대한 의지를 표명했다는 것은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우리는 이 사인이 레토릭에 그치지 않게 만들어야 한다. 지금과 같은 혼돈 속에서 불거져 나오는 언사들이 ‘잔 불 끄기’가 아닌 “꺼진 불도 다시 보는” 지혜를 발휘하여 온 산을 삼켜버릴 불이 나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이 중요하다.
○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
우리는 조급하지 말아야 한다. 초조한 모습을 보일 필요가 없다. 우리는 ‘한반도 평화의 길’을 여는 ‘기회의 창(窓)’인 동시에 그 길 위에 놓여진 ‘다리(橋)’이기 때문이다. 그 다리를 튼튼히 만들고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탱크가 지나가던 그 다리를 사람이 지나가는 다리로 만들어야 한다. ‘한반도 평화의 다리’로 만드는 것이다. 묵묵히 길을 깨끗이 청소하고, 넓혀 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8월로 예정된 한미연합 군사훈련을 중단하는 것이다. ‘한반도 평화의 다리’ 용도를 드러낼 필요가 있다. 이런 조치가 북미 3차 정상회담이라는 '10월의 서프라이즈'(October Surprise)‘ 가능성을 현실화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더 더욱 마다할 이유가 없다. 이와 함께 ‘한반도 평화의 다리’를 관리하는 규칙을 제정하는 일이다. 평화의 다리를 건설한 목적과 용도를 규정하고, 다시는 이 다리를 전쟁의 용도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 첫 걸음이 바로 그 동안 남북 정상 간에 이루어진 6.15·10.4·4.27·9.19 등 4대 합의에 대한 국회 비준이다. 식물국회가 아닌 일하는 국회의 첫 소명이다.
○ 국민이 답이다
국민은 하나이다. 촛불혁명을 이룬 국민, 백척간두의 위기를 예견하고 정치적 결단과 실행을 요구하기 위해 4.15총선에서 거대 여당을 탄생시킨 국민, 그 국민은 하나이다. 국가는 그 국민의 지상명령을 받들어 새로운 한반도 평화의 지평을 열어나가야 할 역사적 소명 앞에 좌고우면할 필요가 없다. 식물국회를 ‘일 하는 국회’로 만들라고 명한 것도 국민이고, 모든 지혜와 힘을 모아 ‘한반도 평화의 다리’를 건설하고, ‘한반도 평화의 길’을 열어나가라고 명한 것도 국민이다. 국민이 흔들림 없어야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잡을 수 있다. 국민 모두의 무게가 실린다면, 어느 누구도 우리를 쓰러트릴 수 없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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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북미정상회담, 왜 다다익선인가?
비대칭 정상회담의 역풍
모든 관계가 그렇듯이 서로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기 위해서는 대칭적이어야 한다. 신사적으로 표현해서 ‘상호 호혜적’이어야 하는 것이다. 세기적인 변화를 이끌 정상회담이라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 가장 모범적인 사례가 레이건 미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공산당 서기장의 정상회담이었다. 레이건-고르바초프 정상회담이 성사된 것도 극적이었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1979.12)으로 미·소 신냉전이 격화되고, ‘냉전의 전사’를 자임한 레이건 행정부가 등장해 핵 군비경쟁을 가열시켜 극도로 핵전쟁 위험을 고조시킨 가운데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이 세기의 정상회담이 쉽게 성사된 것은 아니다. 카터 행정부가 소련과 협상했던 SALT II를 유화정책으로 비판하면서 집권한 레이건 대통령은 소련을 ‘악의 제국’으로 부르면서 동서데탕트 자체를 부정했다. 그 대신 소련의 핵공격을 원천적으로 봉쇄하여 이를 무력화(無力化)해 악의 제국을 붕괴시키겠다는 전략을 채택했다. 그 해법이 ‘스타워즈’로 불리는 '전략방위구상(SDI)' 추진이었다.
반면 ‘냉전의 전사’ 레이건에 맞서게 된 소련 지도부는 SDI를 미국의 핵전쟁 준비 계획과 동일시하면서 SDI를 뚫기 위해 1980년 3만 개였던 소련의 핵무기를 1986년에는 4만 5,000개로 늘리고, 다탄두미사일(MIRV) 개발과 배치에 박차를 가했다. 방패에는 창을, 창에는 방패로 대응하는 능력을 입증하면서 소련과 미국은 가공할 핵전쟁의 수렁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나 인류사회는 막다른 골목에서 세기적인 드라마로 비쳐진 레이건-고르바초프 정상회담을 목격하게 된다.
1차(1885.11, 스위스 제네바), 2차(1986.10,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 3차(1987.12, 미국 워싱턴)로 이어진 레이건-고르바초프 정상회담은 우여곡절 끝에 세 번째 워싱턴 정상회담에서 중거리미사일폐기(INF) 협정에 서명하면서 탈냉전시대를 열게 된다. 그리고 2년 뒤인 1989년 12월 3일 고르바초프는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몰타에서 만나 냉전 종식을 공식 선언해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그렇다면 한반도로서도 70년 만에 맞이한 세기적인 트럼프-김정은 정상회담. 그 회담을 제대로 된 결실로 이어가지 못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비대칭 관계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이 핵을 개발했지만, 창의 위력만 과시할 뿐 미국의 공격을 막을 방패는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미국이 또 다시 SDI 카드를 암시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싱가포르 1차 북미정상회담이 북한이나 한반도에 순풍이었다면, 미국에는 역풍이었고, 하노이 2차 북미정상회담이 한반도와 북한에 역풍이었다면, 미국에는 순풍으로 비쳐진 이유를 뒤집어볼 필요가 있는 이유다.
3차 북미정상회담, 왜 필요한가.
북미정상회담을 추진한 북한이나 미국, 그리고 한국 지도자들은 바보도 아니고 환상론자도 아니다. 중재자를 자임한 문재인 대통령도 김정은 위원장도 한반도와 미국의 관계가 ‘기울어진 운동장’이란 ‘법칙 아닌 법칙’ 속에 놓여있음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그 조건을 염두에 두고 대응하지 않을 수 없다. 김정은 위원장이 말 폭탄을 쏟아내며 트럼프 대통령을 특유의 ‘트윗 전쟁’으로 끌어낸 것은 ‘말 폭탄 위기’를 지렛대 삼아 북미정상회담의 길을 열어놓은 것이란 점에서 흥미롭다. 트럼프-김정은의 말 폭탄 경쟁은 마치 레이건-고르바초프 정상회담의 길을 열게 된 핵무기 경쟁과 같은 효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잠시 기울어진 운동장이 평평하게 보였던 것일까?
문제의 핵심은 경위야 어떻든 간에 두 사례 모두 1차적으로 대화테이블을 마련했고, 또 이를 통해 비정상적으로 보던 상대를 정상적인 시선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소련을 ‘악의 제국’으로 비난했던 레이건 대통령을 1988년 5월에 초청했던 고르바초프는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을 산책하면서 레이건에게 물었다. “아직도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생각하세요?” 대답은 “아니요”였다. 트럼프 역시 김정은을 직접 만나보고는 다시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친구라는 표현이 이를 대변한다.
레이건과 고르바초프의 정상회담은 회담 이전의 적대적이고 편견에 사로잡혔던 서로의 관계가 정상적인 개인적 유대 증진으로 진전을 이루면서 결실을 맺었다. 이와 유사하게 트럼프와 김정은의 정상회담도 개인적 유대관계가 그 자산목록의 첫 순위를 차지한다. 이를 폄하할 필요는 없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라도 일단 서로의 모습을 정확히 바라볼 수 있다면, 새로운 신사협정의 필요성도 떠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트럼프-김정은 정상회담은 지속될 가치가 있다.
1차 싱가포르 회담 성과에 비추어 2차 하노이 회담 노딜의 충격이 큰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은둔의 왕국’처럼 여겨졌던 북한, 그리고 그 지도자가 활기 넘치는 정상적인 정치지도자로서의 면모를 지녔다는 것을 온 세계가 목격할 수 있게 된 것 자체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런 성과를 확장시키지 못한 것이 뼈아프다. 고르바초프의 경우 서방 언론은 그의 등장을 반겼고, 그 부인인 라이샤가 서구 사교계에서도 손색없는 고객이 될 수 있다고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고르바초프를 환대하는 것이 유럽의 평화를 위해 필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 힘으로 고르바초프는 개혁개방정책에 대한 탄력을 얻을 수 있었다.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우리 가 놓치고 있는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비건의 방한
비건의 방한은 김여정의 말 폭탄과 그에 이은 실제 행동 즉 개성 남북연락사무소 폭파, 그리고 이에 이어질 군사행동 예고와 그 심각성을 인지한 우리 정부의 통일안보라인 교체 등, 남북관계의 비상경고등 작동에 따른 반작용임이 분명하다. 우리는 그의 방한이 기본적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이 잘 보존되고 있는가를 확인하는데서 출발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새로운 변화의 기운이 감돌 때마다 이를 확인하고 대처방안을 찾는 것이 주군 노릇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다 중요한 것은 기회 있을 때마다 그들의 그 출발점을 우리 스스로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잡는 기회로 끊임없이 만들어 가는 것이다. 기회를 놓치지 말고 남과 북이 그 균형을 잡기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기울이지 않는 한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잡는 ‘한반도 평화 정상화’의 길은 다가오지 않는다. 겉으로는 말 폭탄을 터트리고, 또 그 말 폭탄을 묵묵히 견뎌내면서도 남과 북이 함께 가는 길은 ‘한반도 평화 정상화’를 만들어 나가는 공동노력의 길이다.
비건의 방한 결산에 대해, 비건이 남북협력에 대한 미국 정부의 강력한 지지 입장을 표명했다는 보도 내용과 미국 정부도 대북 대화 재개에 대한 의지를 표명했다는 것은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우리는 이 사인이 레토릭에 그치지 않게 만들어야 한다. 지금과 같은 혼돈 속에서 불거져 나오는 언사들이 ‘잔 불 끄기’가 아닌 “꺼진 불도 다시 보는” 지혜를 발휘하여 온 산을 삼켜버릴 불이 나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이 중요하다. 비건의 방한 기간에 폼페오 미 국무장관이 “북·미 고위 지도자들이 다시 모일 수 있기를 매우 희망한다.”고 말한 것이나, 이에 화답하듯이 김여정이 트럼프 대통령에 전하는 김정은 위원장의 인사를 전하면서 북·미 대화 재개 가능성을 시사한 것은 어떤 형태로든 양측이 사태의 진전을 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반도 평화 정상화’의 길을 열어나가는 노력은 어떤 환경에서든 멈추지 말아야 한다. 대선을 앞둔 트럼프에게서도 최선의 카드를 뽑아내고, 만약 바이든이 대선에서 이기더라도 그를 상대로 다시 이 길을 가야하는 것이 ‘한반도 평화’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멈추어 서면, 곧 쓰러지거나 후퇴하는 것일 뿐이다.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
우리는 조급하지 말아야 한다. 초조한 모습을 보일 필요가 없다. 우리는 ‘한반도 평화의 길’을 여는 ‘기회의 창(窓)’인 동시에 그 길 위에 놓여진 ‘다리(橋)’이기 때문이다. 그 다리를 튼튼히 만들고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탱크가 지나가던 그 다리를 사람이 지나가는 다리로 만들어야 한다. ‘한반도 평화의 다리’로 만드는 것이다. 묵묵히 길을 깨끗이 청소하고, 넓혀 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8월로 예정된 한미연합 군사훈련을 중단하는 것이다. ‘한반도 평화의 다리’ 용도를 드러낼 필요가 있다. 이런 조치가 북미 3차 정상회담이라는 '10월의 서프라이즈'(October Surprise)‘ 가능성을 현실화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더 더욱 마다할 이유가 없다. ‘한반도 평화 정상화’의 길을 열어나가는 큰 디딤돌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이루어지는 게임이라면, 게임을 통해 그 운동장이 기울어져 있음을 증명하고, 다음 게임에서는 불공정한 게임의 룰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그침 없이 드러내야 한다. 한 번의 실망으로 모든 기회를 날려버리거나 포기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이와 함께 ‘한반도 평화의 다리’를 관리하는 규칙을 제정하는 일이다. 평화의 다리를 건설한 목적과 용도를 규정하고, 다시는 이 다리를 전쟁의 용도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 첫 걸음이 바로 그 동안 남북 정상 간에 이루어진 6.15·10.4·4.27·9.19 등 4대 합의에 대한 국회 비준이다. 통한의 분단 75년과 민족상잔의 비극인 6.25 70년을 맞이했으면서도 ‘한반도 전쟁’ 위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후손들이 오늘의 우리를 보고 무엇이라 하겠는가. 식물국회가 아닌 일하는 국회의 첫 소명이다.
국민이 답이다
“위기(危機)는 호기(好機)를 낳는다.” 즉 ‘위기는 새로운 기회의 창(窓)’이란 뜻이기도 하다. 역사를 도전과 응전으로 해석한 A. 토인비의 혜안은 우리 인류사회에 위기 도래와 이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이 불가피한 운명임을 알려준다. 문제는 언제나 대면할 수밖에 없는 이 위기를 새로운 기회로 만드는 주체가 누구냐는 것이다. 그 답은 명확하다. 그 사회의 구성원, 즉 국민이다.
위기의 국면에서 결단하고 선택하는 국민을 말한다. 그리고 그 국민은 하나이다. 촛불혁명을 이룬 국민, 백척간두의 위기를 예견하고 정치적 결단과 실행을 요구하기 위해 4.15총선에서 거대 여당을 탄생시킨 국민, 그 국민은 하나이다. 국가는 그 국민의 지상명령을 받들어 새로운 한반도 평화의 지평을 열어나가야 할 역사적 소명 앞에 좌고우면할 필요가 없다. 식물국회를 ‘일 하는 국회’로 만들라고 명한 것도 국민이고, 모든 지혜와 힘을 모아 ‘한반도 평화의 다리’를 건설하고, ‘한반도 평화의 길’을 열어나가라고 명한 것도 국민이다.
이를 위해 국민의 위임을 받은 지도자들은 대통령이든 국회의원이든 행정 각료이든 모든 힘을 기울여 ‘한반도 평화의 길’을 열어 나가야 한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인 때문이다. 또한 ‘한반도 평화’가 무엇보다 중요한 국가이익이라면, 모든 국민은 이를 위해 매진하는 정치지도자들을 신뢰하고 뒷받침해야 한다. 여기에 여야, 진보와 보수, 친북친미, 반북반미가 있을 수 없다. 미국과 일본 언론이 그들의 국가이익을 위해, 마치 기울어진 운동장이란 불공정 룰이 당연한 것처럼 떠들어도 우리 언론은 그들에 포로가 되는 정파적 이익에 매몰되지 않아야 한다.
국민이 흔들림 없어야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잡을 수 있다. 국민 모두의 무게가 실린다면, 어느 누구도 우리를 쓰러트릴 수 없기 때문이다. 70년 전에 미국을 비롯한 유엔이 동족상잔의 비극 속에서 대한민국을 구한 것은 고마운 일이다. 이는 세계 평화를 위한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70년 후인 이제 한반도는 새로운 평화의 길을 열어가고 있다. 한반도 평화가 세계 평화의 지름길이라면, 미국을 비롯한 유엔은 마땅히 이를 뒷받침할 ‘공정한 평화의 룰’을 존중하면서 한반도 평화를 향한 대화가 결실을 이룰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야만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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