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진보좌파의 8개 연구단체가 참여하는 '복지국가와 민주주의를 위한 싱크탱크 네트워크'가 출범했다. 진보좌파의 집권전략으로 급부상한 보편적 복지국가 담론을 이끌고 있는 복지국가소사이어티와 노무현 정부를 도왔던 지식인들이 만든 한국미래발전연구원을 비롯해서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코리아연구원, 진보와개혁을위한의제27 등 지난 대선의 충격적 패배 이후 진보좌파의 새 진로를 모색하며 각개약진하던 연구단체들은 힘을 합해서 내년 총선과 대선을 겨냥한 정책개발에 주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계승과 발전'을 내건 이들은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한국 사회가 양극화 심화에 따른 '경제의 위기', 민주주의 후퇴에 따른 '정치의 위기',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 고조에 따른 '평화의 위기', 국민 다수가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지 못한 채 불안의식으로 표류하는 '시민사회의 위기'를 겪고 있다며 '복지·민주·평화'를 그 해법으로 제시했다.
진보좌파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지식인들이 서로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함께 국가비전을 제시하고 나선 것은 '2012년 좌·우 대회전(大會戰)'을 앞둔 의제 설정이 본격화됐음을 의미한다. 이제 진보좌파는 지식인은 물론 정당과 사회운동 세력 등이 '복지·민주·평화'를 중심으로 선거 공약과 정책을 발전시켜 갈 것이다. 이들과 대결하는 보수우파 역시 이에 맞서는 의제를 내놔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될 수밖에 없다.
마침 한나라당의 당권을 새로 잡은 신주류와 소장파는 복지와 감세, 안보 문제 등을 중심으로 기존 당 노선을 수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하지만 이런 움직임은 결과적으로 진보좌파가 설정한 '복지·민주·평화'의 의제 틀 속에 스스로 들어가는 것이다. 자신들은 내년 선거에서 표를 얻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선거전이 본격화되면 짝퉁은 오리지널에 밀릴 수밖에 없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이런 흐름이 가속화될수록 보수우파가 만들려는 나라가 도대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게 된다는 점이다.
보수우파가 괜히 남의 걸음걸이를 기웃거리다 자기 걸음걸이조차 잃어버리는 난감한 상황을 피하려면 진보좌파에 끌려갈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본래 가치로 맞불을 놓아야 한다. 그리고 보수우파는 이에 알맞은 '선진화·공화·통일'이라는 좋은 의제를 이미 갖고 있다. 우선 한나라당 대선 유력 후보들이 지지하는 맞춤형 복지를 '복지'라는 틀이 아니라 '선진화'의 한 부분으로 설명해야 한다. 자기파괴적인 무제한의 '민주' 요구를 공공선(公共善)과 공익(公益)으로 제어하는 '공화(共和)'의 중요성을 설득하고, 북한 정권의 비위를 맞춰서 얻는 고식적인 '평화'가 아니라 한민족의 번영과 동북아의 안정을 추구하는 '통일'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가치임을 분명히 주장해야 한다.
미국의 인지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는 저서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에서 선거에 이기려면 상대방이 설정한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지적하며, 민주당과 진보세력에 공화당(코끼리)과 보수세력이 제기한 논쟁거리에 말려들지 말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내년 총선에서 쓰나미에 휩쓸려버릴지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한나라당 정치인들은 상대방이 들고 있는 떡이 너무 커 보여서 이런 충고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들이 냉정을 되찾고 좀 더 근본적이고 넓은 시각에서 다시 생각하게 만들려면 보수우파도 지식인과 싱크탱크들이 움직여야 할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