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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포용하는 민주적 생산틀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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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수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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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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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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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집 교수 한국사회를 말하다 /노동 포용하는 민주적 생산틀을
대담 : 권태선 한겨레 편집부국장
최장집 교수(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장)가 말문을 열었다. 학문활동에 전념해온 최 교수는 “현실문제에 대해 제대로 발언할 때가 온 것 같다”며 〈한겨레〉의 신년 인터뷰에 응했다. 그의 진단과 비판은 강렬했다.
1980년대 본격화된 노동운동 연구와 1990년대 만개한 시민사회론은 최 교수의 초창기 이론적 성과와 관련돼 있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후마니타스), 〈한국 민주주의의 조건과 전망〉(나남) 등을 통해 우리 시대 민주주의 문제를 이해하는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도 받는다.
특히 그는 2004년 하반기부터 각종 논문을 통해 ‘동아시아 냉전구조 비판’ ‘한국 헌정체제 비판’ ‘사회경제적 기반이 약한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 등 구체적 발언으로 큰 주목을 받고 있다. 미증유의 대내외적 도전과 위기에 처한 한국 사회의 2005년 전망과 제언을 최 교수에게 청해 들은 이유다.
권태선 편집부국장이 진행한 인터뷰는 최 교수의 연구실에서 3시간30분 동안 이어졌다.
권태선 편집부국장=올해는 해방 60돌, 을사조약 100돌, 한-일 국교 재개 40돌이 되는 해다. 그러나 우리를 둘러싼 국내외 환경은 엄혹하기만 하다. 안으로는 양극화로 표현되는 내부의 분단이 심각하고 대외적으로는 북한 핵문제가 결정적 국면으로 진입하고 있다. 국내외의 상황에 대해 어떻게 진단하고 있나.
최장집 교수=한국이 당면한 문제는 크게 두가지다. 북핵위기로 상징되는 북한문제와 이 문제를 중심으로 한 한-미·한-일·한-중 관계 등 대외적 관계를 면밀하게 검토하고 개척하는 것이 하나다. 다른 하나는 이런 문제를 다뤄야 할 정치체제에 대한 것이다. 민주정부가 이런 큰 문제를 다루기 위해선 국내의 지지기반을 강화하고, 사회경제적 문제도 능력있게 풀어가면서 대외문제를 대면해야 된다.
권=우선 내부 문제부터 이야기해보자. 선생께선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위기와 관련해 그 사회경제적 기반의 취약성과 헌정체제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먼저 사회경제적 기반이 어떻게 민주주의에 위기를 가져오고 있는지부터 살펴보고 싶다.
재벌중심 구조탓 중소기업 붕괴·고용 불안
정부-재계 ‘노동해법 빅딜’ 생각해볼수도
최=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들의 최근 인식은 ‘불만’이라는 말로 집약된다. 그 핵심은 구제금융 이후 심화되고 있는 사회경제적 문제를 민주정부가 정치적 방법을 통해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데 있다.
사회는 갈등의 구조이고, 민주주의는 곧 갈등을 제도화하는 하나의 체제다. 갈등을 해소·관리하기 위해서는 갈등이 정치수준에서 표현·조직·경쟁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선 여러가지 이데올로기적 영향 때문에 갈등이 없어야 할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억제돼 왔다. 갈등이 표출되고 정치적으로 조직될 때만 사회적 약자가 보호될 수 있다. 갈등 없는 사회를 말하는 것은 사회의 기득구조를 유지·온존시키는 것과 같다.
갈등을 표출하고 다루는 방식이 달라져야 한다. 민주주의가 공동체를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지 못하고, 여기서 제기되는 갈등이 정치의 방법으로 해소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 민주주의의 현실이다.
권=그렇다면 우리 사회가 직면한 사회경제적 문제의 실체는 무엇인가?
최=민주주의 아래서 권위주의 시대의 성장중심 발전모델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재벌중심 구조는 개혁되지 않았다. 경기부양이 중심적인 경제정책으로 논의되고 있다. 이 체제 아래서는 성장을 위해 재벌을 지원하지 않을 수 없고, 그 아래에 놓인 중소기업과 노동자들이 나쁜 시장조건과 고용불안에 놓이게 되고, 전체 분배구조가 악화되는 것을 피할 길이 없다. 이것이 현재 위기의 핵심이다.
권=현시점에서 이를 돌파할 방법은 있나?
최=성장정책 중심의 구조를 변화시키는 시도는 민주정부 아래서 충분히 가능하다. 지금의 구조에서는 성장지표가 올라가도 고용이 확대되지 않고 분배구조가 개선되지 않는다. 그 성과는 주로 대기업에 집중되는데, 이들의 고용 효과는 대단히 제한적이다. 미국 등 외국 사례를 봐도, 고용을 포섭하는 것은 중소기업이다. 우리의 경우엔 세계화의 충격 앞에서 중소기업은 붕괴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중소기업을 강화하고 재벌과 중소기업 간의 관계를 재편해야 한다. 기업간·산업간·부문간 수평적 관계의 강화를 통해 생산체제 전반이 민주화돼야 한다. 생산체제의 민주화에 기반을 둔 성장정책이 필요하다. 기존 성장정책에 대해 조금이라도 다른 말을 하면 반시장적·반개혁적, 심지어 사회주의적이라는 이념공격을 벌이는 것은 현실을 외면하고 대안을 봉쇄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조건 아래서도 한 나라의 정부가 경제생산체제를 국민경제 범위 안에서 민주적으로 재편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조성하는 경제환경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시장근본주의로 상징되는 국제통화기금의 독트린이나 워싱턴 컨센서스를 그대로 추수하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다.
권=일전의 한 글에서 비자유주의적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했는데, 그때의 비자유주의적 대안이란 어떤 것을 염두에 두고 말한 것인가. ‘제3의 길’식 접근법이 가능하다고 보는가?
최=우리나라엔 사민주의 전통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유럽의 사민주의적 이념이나 프로젝트가 한국사회에 그대로 적용될 수 없다. 그럼에도 제3의 길은 한국적 현실에 맞는 대안을 모색함에 있어 참조해야 할 중요한 모델이다. 기든스가 제3의 길을 처음 언급한 것이 1993년이었는데, 지난해 다시 ‘2세대’ 제3의 길을 거론하면서 국가의 중요성과 사회에 뿌리를 둔 시장구조 등을 강조했다.
사회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면서도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성장일변도의 정책과 구조를 그대로 놔둬서는 안 된다. 사회통합을 지향하면서 노동문제를 포괄하는 새로운 형태의 생산체제의 틀을 만들어야 한다. 노동문제가 핵심이다. 노사 공존의 기업공동체를 만들지 못하는 한, 부존자원이 많지도 않고 금융 및 자본시장의 센터로 성장하기도 어려운 한국에서 새로운 성장동력을 구축할 수 없다. 인적자원이 가장 중요하고, 이는 결국 노동의 문제다. 한국을 대표하는 대표적 기업인 삼성은 아직 노동조합조차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문제가 사회 전체가 노동을 파트너로 수용하는 일을 막는다. 재벌은 변해야 한다. 그럴 때만 새로운 성장체제의 구축을 위해 기업과 민주정부 간의 교환과 협조가 가능할 것이다. 예를 들어 재벌기업의 소유권 문제에 대해 정부가 정책적인 조건을 만들어주고, 대신 재벌이 노동을 파트너로 수용하게 만드는 ‘트레이드 오프’를 제기할 수 있다.
권=정부가 노사 공존의 기업공동체를 만들어내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기 위해선 정부 자체가 상당한 정도의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미 지적했듯이 민주화 이후 들어선 민주정부는 상당히 취약했고 그 가운데서도 현 정부는 더욱 취약한 상황이다. 이런 정부가 어떻게 하면 그런 역할을 감당해낼 수 있을까?
갈등을 부정적 인식…정치적 해소길 막아
이념적 공간 좁은 현 정당체제 변화해야
최=민주화 이후 우리 정부의 경제정책은 허약한 정당구조 때문에 지지의 동원이 매우 약하다. 대개 경제이론가들은 시장원리를 무비판적으로 강조하고, 경제정책 담당자들은 기술관료적 정책결정을 해왔다. 그러나 중요한 경제정책에는 각 집단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고 그 이해관계가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다. 기득권층이나 대기업·재벌의 영향력은 정책을 좌우할 만큼 강하다. 정당을 통해 대안적 정책에 대한 지지를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시장은 자연발생적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다.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 정부가 법과 제도를 통해 시장의 틀을 형성하고 공정경쟁의 규칙을 만들어줘야 한다. 이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정부의 가장 핵심적인 기능이다.
권=민주주의의 중요한 주체인 노동 부문이 친노동정부가 될 것으로 기대됐던 노무현 정부 이후 오히려 약화되고 있는 듯하다. 민주노총에 대화와 타협을 중시하는 지도부가 들어서고 사상 처음으로 노동자 정당을 표방하는 민주노동당이 원내에 진출했는데도 노동자들의 사회내 입지가 더 악화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최=우리 정당체제는 이념적으로 협소한 공간에서 만들어졌다. 우리 사회의 갈등과 균열을 포괄적으로 대변할 수 있는 체제가 아니다. 민주화 이후 정당체제는 ‘87년 체제’라고 부를 수 있는데, 그것은 계층·계급, 사회집단, 특히 노동문제를 대변하는 정당이 중요정당이 되지 못하는 구조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대통령이 정부를 구성했다 하더라도 노동문제와 더 친화성을 갖는다는 보장이 없다. 기존의 민주정부는 노동문제를 대변하는 것을 기본정책으로 삼지 않았다. 정치적 지지기반도 노동이 아니었고, 이에 대한 연결고리도 존재하지 않았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노동이 아무리 사회에서 중요한 갈등 문제라 해도, 어디까지나 특수이익의 범주라고 볼 수 있다. 사회 전체 이익을 대변할 수 없는 큰 특수이익의 하나에 불과하다. 그래서 노동운동의 요구와 정부의 요구는 끊임없이 충돌과 타협이라는 연속적 사이클을 그려왔다. 여기서 노무현 정부도 예외일 수 없다.
노동문제가 좀더 보편적인 이슈로 다뤄지려면 정당의 역할이 중요하다. 민주노동당이 17대 총선을 통해 원내에 진출했지만 아직 기존 정당체제 구조가 변화된 것은 아니다.
기존의 보수적·중도적 정당을 정점으로 하는 정치에 대한 불만이 누적됐고, 이런 불만이 민노당의 지지로 표출됐지만, 87년 체제가 안고 있는 한국 정당체제의 문제는 아직 그대로 있다. 물론 민노당의 조직기반, 대중기반, 지역기반이 협소한 것에도 문제는 있다.
권= 현 정부나 김대중 정부는 노동문제를 풀기 위한 방안으로 노사정 대타협을 도모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왜 이런 모델이 작동하지 못하는 것인가.
최= 정부대표, 기업대표, 노동자 대표의 3자 협의기구라는 유럽 코포라티즘을 실현할 전제조건과 구조가 우리나라엔 없다. 그게 가능하려면 우선 사민주의 이념이 많은 사람들에게 수용되고, 노동자를 대표하는 정당이 있고, 노동 생산현장에서 노동운동이 기업의 파트너로 자리잡고, 노동과 기업이 공존하는 문화를 공동체 가치로 수용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필요하다. 우리는 이런 게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노사정위라는 말만 가져왔다. 여기에 많은 걸 기대하는 것 자체가 허구다.
노 대통령 LA발언, 새 외교 패러다임 제시
\'기득권층 극복\' 분명한 정부 입장 밝혀야
권 = 2004년은 헌법의 중요성을 새삼 상기시켜준 한해였다. 대통령탄핵과 행정수도이전 문제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평결 이후 민주주의와 법치의 관계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최= 제도의 디자인을 통해 민주주의가 질적으로 변화한다고 믿지 않는다. 좋은 헌법이 아니라 좋은 정치가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한다. 대통령 탄핵소추 기각과 행정수도 위헌결정은 한국 민주주의 작동의 문제점을 그대로 드러낸 사건이다.
민주화 이후, 정당이 제 역할을 못하면서 정치권 전체에 대해 냉소주의와 비판이 심화됐다. 이것이 다시 민주주의 자체를 허약하게 만든 측면이 있다. 이런 풍토에서 헌재로 대표되는 사법부가 중립적 심판자로 등장해 그 역할이 커진 것이다.
만약 지난 탄핵위헌결정 때, 정치일정상 총선이 임박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헌재는 대통령을 탄핵했을 지도 모른다. 헌재 판사들은 비정치적 제도와 역할로 상정되지만, 정치적 역할을 하는 주요 행위자의 하나다. 사법부가 사회적 이익을 초월해서 행위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현실과 다른 경우가 많다.
권= 그렇기 때문에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 선출된 권력의 우위에 서도록 만든 현재의 헌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최= 우리 헌법은 87년 민주화운동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민주화세력은 새로운 헌법을 만드는데 초청받지도 참여하지도 못했다. 권위주의 집권당 주도 아래 야당이 참여해 만들어진 당시 헌법은 사회의 민주적 요구를 충분히 반영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 헌법은 대통령 선출방식, 의회권한 및 헌재권한 강화 등 기존 엘리트 카르텔의 관심사를 주로 반영했다.
민주적 대통령은 한편으로는 민의를 실현할 수 있는 권한을 가져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권력의 남용이 제약될 때 가능하다. 하지만 87년 헌법은 전자를 소흘히 하고, 후자에만 초첨을 뒀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
현재의 헌법을 재조명하고 민주화 이후의 경험에 비춰 대안적 방안이 폭넓게 논의돼야 한다. 특히 사법부 역할에 대한 재규정이 필요하다. 헌재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권한이 지나치게 비대하다. 사법부의 판결이 입법적 효과를 갖는 것은 민주주의 원리와 상충된다. 사법부에 의한 입법기능과 이를 가능케 하는 과도한 헌법해석은 제한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 헌법은 분단국가의 모순을 고스란히 안고 있기 때문에, 법관들이 이를 보수적으로 해석하면 민주주의와 병립할 수 없다.
권= 노무현 정부는 17대 총선을 통해 다수당이 돼 입법과 행정을 다 장악했는데도, 여전히 무능하거나 무력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 결과 노 대통령이나 열린우리당의 지지도도 바닥을 헤매고 있다.
최= 이는 노무현 정부의 지지기반과 관계 있다. 열린우리당은 과거 민주당의 중심이 아니라 주변으로부터 왔다. 지지세력도 정당구조 바깥으로부터 왔다. 그래서 제도화된 틀 안에서는 지지기반이 대단히 협소하고 그 틀 밖에서는 대단히 유동적이다. 이 때문에 현 정부가 동원할 인적자원이 부족하고, 자신을 당선시켜준 투표자들에 대한 연결고리나 책임성이 약하다.
또다른 측면도 있다. 김대중 정부 시기 민주화는 주로 정치혁명이라 부를만한 정치적 변화에 국한된 것이었다. 그 결과물로 김대중 정부가 등장했다. 이런 정치적 혁명은 다른 분야로 확산되고, 사회 하위 구조로 넓어지면서 정치뿐만 아니라 사회전반에 걸쳐 광범위한 변화를 가져왔다. 사회혁명이라 부를만하다.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 자체가 이런 변화의 반영이다.
결과적으로 김대중 정부 때보다 현재의 개혁이슈들이 훨씬 넓어졌다. 그 내용은 기득세력들의 이익을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것이다. 이들이 이데올로기적이고 비이성적인 공격성을 드러내는 것은 우리 사회의 변화의 물결에 대해 보수세력이 커다란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현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권= 북한 핵문제는 올해 중요한 전기를 맞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재집권했고, 6자회담도 그 본질문제를 향해가고 있다. 한국 정부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할 것으로 보이는데.
최= 북한 문제는 냉전의 한 유산이다. 북핵 위기는 동아시아 냉전구조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 그런 측면에서 북핵문제는 우리나라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문제, 미국의 문제, 전 세계의 문제다. 이런 배경을 놓고 볼 때, 지난해 11월 노무현 대통령의 로스앤젤레스 발언을 대단히 높게 평가한다.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은 미국 클린턴 행정부의 이른바 ‘페리 프로세스’라는 틀 안에서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 것이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북한 문제에 대한 우리의 관점과 해결책을 미국 부시 행정부의 의지·정책에 역행하면서까지 공개적으로 전 세계에 발언했다. 이를 주체적 외교의 탄생으로 평가하고 싶다. 보수적인 여론은 로스앤젤레스 발언을 위험천만하다고 비판했지만, 결과가 말해주듯이 미국은 이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면에서 노 대통령은 새로운 외교의 패러다임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외교의 시작이 앞으로 어떤 내용으로 채워질 것인가는 커다란 관심거리다.
북핵문제를 ‘북한의 문제’로만 국한시켜서는 안된다. 이는 동아시아 냉전구조와 관련된 문제이며, 탈냉전적 동아시아 국제체제를 만드는 문제다. 또한 북핵 문제가 북한의 체제존립과 관련된 것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북한체제를 보장해주는 국제관계 메카니즘을 발전시켜 북핵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동아시아 평화공동체라는 다자주의적 공동안보의 틀이 구축돼야 한다. 6자 회담을 계기로 동아시아 평화와 공존을 관리할 항구적 제도를 만드는 작업을 우리 정부가 주도해야 할 것이다.
권= 그러나 북핵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여전히 강경한 것 아닌가. 또 아세안+3이 중국 주도로 움직이는 것에 대해 미국이 거부감을 보이고 있는데, 동아시아평화공동체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미국이 제동을 걸 위험성이 있을 것 같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의 구실은 무엇인가.
\'사법부에 의한 입법\' 민주주의와 상충
지시인 현실안주 탓 보수언론 힘 세져
최= 지금까지는 냉전구조 아래 한미관계가 절대화됐다. 한미관계가 변화되거나 약화되면 우리는 죽는다는 위기의식이 많았다. 그러나 이제는 한미관계를 상대적으로 보는 게 필요하다. 한미 공조나 동맹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이를 중심으로 하되 얼마든지 이 폭을 넓히고 우리의 자립성 위에서 한미관계를 성찰적으로 인식하고 발전시킬 수 있다.
북핵위기를 중심으로 동아시아에서 공동의 문제해결의 틀을 만든다면 동아시아는 미국, 유럽연합에 이어 제3의 세계중심이 될 수 있다. 한국의 민주화는 세계에 자랑할 만한 일이지만 이는 국내적 변화일 뿐이다. 민주주의는 보편적인 문제다. 평화·공존 등은 한국이 국내 민주화를 토대로 세계적 비전이나 가치를 제시할 수 있는 또하나의 영역이며 기회다. 이것은 민주세력, 민주정부가 해야할 과제다.
동시에 이런 보편적 접근을 통해서만, 비이성적인 냉전반공주의의 기반을 와해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한국의 민주화 세력이 내부에 확실한 지지기반을 갖고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정책을 제기할 때, 누구도 여기에 대해 말하지 못한다. 이게 바로 민주주의의 힘이다. 이 정부는 보편적 차원에서 대외문제를 접근해야 하고, 민주주의 세력의 지지를 끌어내고, 이 힘으로 국내 사회경제 문제도 풀어야 한다. 한국 민주주의의 앞날은 이 두가지 중심적 과제를 풀어나가는 데 달려 있다.
권=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과 관련해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최= 최근 상황과 관련해 보수언론의 책임을 많이 거론한다. 그러나 언론의 책임보다 내가 속한 지식인 사회에 책임이 더 많은 게 아닌가 한다. 민주화 이후, 지식인 또는 대학사회가 현실 문제를 얼마나 사려깊게 이해하고 대안을 모색했는지 자문하게 된다. 강한 보수언론은 약한 지식인의 결과다. 언론이 의제를 제기하고 지식인은 그 소비자 혹은 재생산자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이것이 한국사회의 비합리적 헤게모니 구조를 만들어 보수언론이 힘을 갖게 만든다.
민주화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공론의 장에서 지식인들의 역할은 너무나 저조하다.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대학사회에 몸담고 있는 기득권적 위치에 있는데, 이들이 현실에 안주하고 있다. 외국에서 가져온 개념과 이론을 무매개적으로 맥락없이 한국사회에 무차별적으로 적용한다. 지식인들이 우리 현실에 뿌리를 두고 현실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는 데 기여해야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 있다.
정리/안수찬 기자, 사진/이정아 기자 ahn@hani.co.kr
매체명 한겨레
작성일 2005-01-01
면정보 08
글자수 9151
면종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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